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14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마침내 종착지에 다다랐다.

출범에서 타결에 이르는 모든 협상 과정은 그야말로 각본 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미 FTA 출범 과정과 긴박하게 진행돼온 425일간의 협상,타결 과정을 한 장면씩 되짚어본다.


# 노무현-김현종의 첫 만남

'따르릉….' 2003년 2월 어느 날 스위스 제네바.김현종 세계무역기구(WTO) 수석법률자문관에게 서울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였다.

노무현 당선자에게 통상 현안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해달라는 요청이있다.

1995~1999년 외교부 고문변호사로 통상소송 승소율이 높았던 데다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WTO 법률자문관으로 일하던 그가 새 인물을 찾던 노 당선자의 눈길을 끈 것이다.

김 자문관의 프레젠테이션 메시지는 간단하고 명확했다.

"WTO 도하라운드(DDA)가 정체되고 세계 각국은 자유무역협정(FTA) 전쟁을 벌이고 있다.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다.가만히 있으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이런 식의 보고를 한 그를 놓고 "다른 사람들은 시키면 한다는 식인데,김현종은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식이었다"라고 평했다.

며칠 뒤 김 자문관은 청와대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고,2003년 5월 통상교섭본부의 2인자인 통상교섭조정관(차관보)에 전격 임명됐다.

미 컬럼비아대 석·박사,미국 변호사,홍익대 무역학과 교수,WTO 수석법률자문관 등 이력은 화려하지만 외교관(김병연 전 노르웨이 대사)의 아들로 전 세계를 떠돌며 자랐기 때문에 한국에 인맥이나 학맥이 없는 그였다.


# 한국의 통상조직을 접수하다

김 신임 조정관은 즉시 'FTA 추진 로드맵' 작성에 들어갔다.

2003년 8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선 그가 주도해 만든 'FTA 추진 로드맵'을 승인했다.

단기적으로는 싱가포르 아세안(ASEAN) 멕시코,중장기적으로는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등 거대경제권과 FTA를 맺겠다는 내용이었다.

통상교섭본부는 즉각 싱가포르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일본 등과의 FTA 협상에 돌입했다.

또 아세안과는 FTA를 위한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7월 44세에 불과한 그를 한국 통상정책의 사령탑인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조정관이 된 지 1년3개월 만이었다.

본부장이 되자 즉시 FTA국을 신설한 뒤 캐나다 멕시코 등과 협상을 시작했다.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회원국인 캐나다 멕시코와의 협상을 통해 미국과의 협상을 연습하고 미국을 자극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는 미국에 갈 때마다 의회를 찾아 "한국은 미국과 베트남부터 이라크까지 같이 간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 경제동맹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했다.

하지만 미국은 냉담했다.

3년간의 한·미 투자협정(BIT) 협상이 2000년 5월 스크린쿼터에 발목이 잡혀 결렬된 뒤 한국에 대한 신뢰를 잃은 터였다.

김 본부장은 취임 즉시 로버트 포트먼 당시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만나 설득에 나섰고 심지어 미국이 가장 경계하는 중국과의 FTA 가능성을 흘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불거진 것이 △스크린쿼터 폐지 △미국산 쇠고기 금수 해제 △배기가스 규제 완화 △의약품 가격 재조정 금지 등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이다.

한국이 협상 의지가 있다면 선결조건 해결을 통해 입증해 보란 것이었다.


#4대 선결조건의 등장

4대 선결조건 해결엔 대통령의 의지가 필요했다.

2005년 9월9일 노 대통령과 김 본부장은 멕시코로 향하는 전세기 안에서 마주 앉았다.

"선진형 통상국가로 가려면 미국과의 FTA가 필요합니다.협상은 자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창 밖을 내다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당장 시작하자." 노 대통령이 한·미 FTA의 결심을 굳힌 순간이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정부는 2005년 10월30일 약값 재평가 제도 개정 중단→11월6일 배출가스 강화 기준 수입자 적용 유예→11월16일 미국산 쇠고기 금수조치 해제를 발표했다.


# 노무현-부시 협상출범 합의

이제 한·미 FTA 협상 출범은 기정사실이 됐다.

마침 2005년 11월17일 13차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노 대통령이 경주에서 오찬을 함께했다.

김 본부장과 포트먼 대표가 동석했다.

배석자의 프로필을 본 부시 대통령은 앉자마자 김 본부장에게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죠?"라고 물었다.

미국 동부 명문(앤도버 고교)을 나온 그가 김 본부장이 같은 지역 학교(윌브램 맨슨 고교)를 졸업한 것을 감안해 한 질문이었다.

김 본부장은 "각하가 나온 학교보다 좋은 곳을 나왔습니다"라며 받아쳤고 오찬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부시는 노 대통령을 쳐다보며 "당신의 통상장관이 내 시험을 통과했군요(Your Trade Minister passed my exam)"라며 파안대소했다.

김 본부장을 말이 통하는 사람,협상을 해볼 만한 사람으로 인정한 것이다.

1년 이상 물밑에서 추진돼오던 한·미 FTA 협상은 그자리에서 공식화됐고 양 정상은 '한미 경제협력'을 강화한다는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 극비 출범과 반미 세력의 결집

2006년 1월18일 노 대통령은 신년연설에서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미국과도 FTA를 맺어야 한다.

조율이 되는 대로 협상을 시작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1월26일 정부는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키로 했고 2월2일 한·미 FTA 추진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

2월3일 오전 5시(미국시간 2일 오후 3시)엔 워싱턴 미 의회 의사당에서 김 본부장과 포트먼 대표가 협상 출범을 선언했다.

007 작전 스타일이었다.

반대에 부딪힐 것을 우려해 극비리에 진행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패착이었다.

민주노총 등 300여개 단체는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를 출범시켜 조직적 반대에 나섰고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과 이정우 전 정책실장 등 친정부 인사까지 '밀실 출범'이라며 반대에 합류했다.

게다가 방송시장 개방을 두려워한 KBS MBC 등이 앞다퉈 미국과 NAFTA를 맺은 멕시코의 빈민촌 등을 찍은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인터넷에는 의료비와 수도,전기 등 공공요금이 폭등할 것이라는 악성 루머까지 퍼졌다.


#협사의 막이 오른다

1차 협상은 2006년 6월5일에야 미 워싱턴에서 시작됐다.

무역촉진권(TPA) 시한에 쫓긴 양국은 5월 초 개최하려 했으나 5·31 지방선거를 앞둔 열린우리당이 협상을 늦춰달라고 강력히 요구해왔다.

지난해 APEC에서 양국 대사로 안면을 익힌 김종훈 대사와 웬디 커틀러 한국·일본 담당 대표보가 수석대표로 나섰다.

양국은 4월 예비협상에서 12월 5차 회담까지만 일정을 잡았다.

양국 간 통상 현안은 자동차 의약품 지식재산권 무역구제 등 수십년째 다뤄온 이슈였던 만큼 빨리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양국은 7월 서울 2차 협상 때 관세 양허안을 교환하기로 하는 등 이례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계획같이 순조롭진 않았다.

2차 협상에서 미국은 한국이 5월 약값 적정화 방안을 발표한 것에 대해 "축구를 하기로 한 뒤 골대를 치운 격"이라며 의약품 작업반 회의를 거부,암운이 드리웠다.

특히 포트먼 대표가 4월 백악관 예산실장으로 떠나자 김 본부장의 자신감도 떨어졌다.

포트먼 대표와는 서로 통하는 사이였다.

김 본부장의 고심에 찬 요청에 며칠간의 고민 끝에 '뼈없는 쇠고기'란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을 받아준 것도 그였다.

새로 임명된 수전 슈워브 대표는 깐깐하기로 소문 난 인물이었다.


#끊임없이 제기된 음모설

"노 대통령의 한·미 FTA 추진은 진짜 체결을 위한 게 아니라,2007년 대선을 앞둔 적정 시점에 결렬을 선언해 반미 감정을 극대화하고 진보진영 중심의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 협상단을 가장 괴롭힌 것은 음모론이었다.

노 대통령이 협상을 결국 다음 대선에서의 '꽃놀이패'로 쓸 것이라는 게 요지였다.

특히 참여정부의 두 축인 방송과 시민단체들이 반대에 앞장서자 음모론엔 불이 붙었다.

김종훈 대표 교체론까지 등장했다.

김 대표가 12월 5차 협상에서 "내가 끝까지 책임질 것"이라고 강변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노 대통령이 2006년 하반기 내내 한·미 FTA에 대한 발언을 자제하며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 것도 원인이었다.

이런 논란은 노 대통령이 2007년 연두기자회견에서 확실히 의지를 재확인하기까지 내내 불안요인으로 작용했다.


# 쇠고기 뼛조각과 몬태나 결투

지뢰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2년10개월 만에 수입이 재개된 미국산 쇠고기 1~3차 수입분이 11월 '뼛조각' 때문에 폐기됐다.

한국은 수입위생조건에 따라 '뼈없는 쇠고기'만이 통관이 가능하다며 엑스레이 검사기를 동원,651개 박스 중 3개 박스에서 뼛조각을 찾아내 모든 박스의 통관을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열린 12월 5차 협상은 미국 비프벨트(beef belt)의 한가운데인 몬태나에서 열렸다.

한국이 4차 협상을 감귤 주산지인 제주에서 연 데 맞서 개최한 것.이는 '쇠고기 뼛조각' 문제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협상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커틀러 대표는 "서로 무역하는 국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성토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 한국 협상단은 무역구제 개선을 카드로 내걸었다.

한국은 미국이 무역구제 개선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며 자동차와 의약품 협상을 전격 중단시켰다.

TPA 때문에 12월 말까지 미 협상단이 미 의회에 무역구제 개정 의사를 통보해야 함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12월27일 밤 10시 미 협상단은 한국의 무역구제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미 의회와 한국에 통보했다.

카란 바티아 USTR 부대표가 김 본부장에게 전화해 "새 제안에 대해선 논의할 수 있다"고 달랬지만 협상은 결렬로 치닫는 듯했다.

김 본부장과 바티아 부대표,김종훈 대표와 커틀러 대표가 1월 초 하와이에서 만나 '2+2' 담판을 벌였지만 "협상 타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원칙 확인에 그쳤다.


# 적은 내부에 있었다

협상이 꽉 막힌 가운데 내부 분열도 심각했다.

재정경제부와 외교통상부는 협상을 타결시키자는 쪽이었고 산업자원부 농림부 보건복지부 등은 가진 것을 내주기 어렵다고 맞섰다.

산자부와 외교부는 통상교섭본부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해묵은 갈등까지 표출했다.

'한의사 자격 개방 파동'은 부처 간 갈등이 빚어낸 해프닝이었다.

12월 5차 협상 때 한국이 전문직종의 상호인정을 추진한 데 대해 미국이 '우리 침구사 업계가 한국에 관심이 있을 수 있다'고 언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의대 학생과 한의사들이 총궐기에 나선 것이다.

이는 협상에 참가했던 보건복지부의 담당 공무원이 '미국에서 굉장히 관심 있어 하더라'고 한의사협회에 알려줬기 때문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이 같은 요구를 7차 협상 중 철회했지만 이를 카드로 다른 것을 얻어냈다.

1월 6차 협상 와중엔 협상단이 국회 FTA 특위에만 비공개로 공개한 하와이 고위급 회담 결과와 대응대책을 담은 대외비 문건이 한겨례신문 등에 누출된 '문건유출사건'까지 발생했다.


# 2월초에 터진 모멘텀

2월 초 워싱턴 7차 협상을 앞둔 어느 날,미 협상단의 전문이 한·미 FTA 기획단에 도착했다.

"무역구제와 의약품 요구를 서로 낮춰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한국이 무역구제 요구가 사실상 거부되자 "우리도 자동차 의약품 등 미국이 원하는 사안을 수용할 수 없다"고 밝힌 것에 대한 양보안이었다.

표류하던 협상은 돌연 활기를 띠었다.

특히 7차 협상 전 '노 대통령이 3월 말 타결을 위해 부시 대통령과 전화 회담을 한다'는 소식과 함께 권오규 경제부총리가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장관들이 협조를 안 하면 내가 책임지고 조율한다"며 협상단에 힘을 실은 것도 이때다.

7차 협상에서 양국은 처음으로 핵심 쟁점 간 '스몰 딜'에 성공했다.

미국은 한국의 무역구제 요구 중 법률 개정이 필요 없는 △무역구제 협력위원회 설치 △다자간 세이프가드 발동시 상호 적용 배제 등만 받아들이되,의약품 분야에서 신약 최저가 보장 요구를 거둬들였다.

미국은 또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에서 부동산·조세 정책을 제외'하자는 한국의 주장도 수용했다.

4차 제주 협상에서 양국의 상품 관세 양허 수준을 비슷하게 맞추는 데 성공한 이후 최대의 성과였다.

협상은 드디어 전진하는 듯했다.


#돌출한 미국 민주당 변수

시한을 20여일 앞둔 3월8일 8차 서울 협상이 열렸지만 예상과 달리 공전됐다.

미 민주당이 2006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압승한 여파로 자동차가 새 걸림돌로 등장한 것.8차 협상 직전 샌더 레빈 하원의원(민주·미시간) 등이 부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매년 미국 차의 한국 수출 증가분만큼만 한국 차에 대해 무관세 혜택을 부여하자"는 비상식적인 내용까지 요구했다.

미국은 2차 협상 때 자동차를 관세 철폐의'예외(Unidentified)' 종목으로 분류한 뒤 한국의 세제 개편 등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면 철폐 기간을 밝히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공식 협상인 8차에서도 미국은 구체적 철폐 기간을 내놓지 않았다.

한국은 필사적이었다.

대미 수출액의 24%를 차지하는 자동차와 부품의 관세 철폐 없이는 한·미 FTA 체결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GM 포드 등 미 업계가 원하는 게 '관세를 철폐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 전해지며 우리가 뭘 내놓아도 미국은 관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설이 제기됐다.


# 10회말 연장 …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이제 그냥 자자."

3월31일 오전 4시30분께 배종하 농업분과 한국 분과장은 미국이 탐내는 쇠고기 시장을 1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개방하겠다는 관세 폐지안을 던졌다.

'받거나 말거나' 택하라는 최후 통첩이었다.

양국이 최종 통상장관 회담의 시한으로 설정한 3월31일 오전 7시를 2시간30분 앞둔 때였다.

미국은 당황했다.

시한이 다가오면 한국이 상당한 양보안을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결국 오전 7시30분 협상이 48시간 연장됐다.

쇠고기와 자동차 등에서만 쟁점을 남긴 양국이 미국의 TPA 법령을 적극적으로 해석,연장전에 들어간 것.시한은 3월31일 새벽에서 4월1일 새벽 1시로 늦춰졌다.

그러나 4월2일 새벽 1시에도 양국은 "버티는 쪽이 이긴다"는 식으로 여전히 완강했다.

김 본부장과 바티아 부대표는 4월2일 오전 11시 마주 앉았다.

두 시간 뒤면 미국시간 4월1일이 끝나 TPA는 물건너 가는 상황.바티아 부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쌀 개방 요구를 철회하겠다." 김 본부장은 서서히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태평양을 오가며 14개월간 치른 피말리는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