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공산당 주석은 4명의 여성과 결혼해 모두 10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으나 둘째 아들 마오안칭(毛岸靑)이 사망함으로써 이제는 배 다른 두 딸만 남게 됐다.

1907년 부모의 강요로 여섯살 위인 리바오산(李寶珊)과 애정없는 첫 결혼을 했다가 자녀를 두지 않고 곧 헤어진 마오쩌둥은 둘째 부인 양카이후이(楊開慧)와의 사이에 안잉(岸英. 1922년생), 안칭, 안룽(岸龍. 1930년생)의 3형제를 두었다.

큰 아들 안잉은 1950년 한국전쟁에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가 그해 11월 미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했고, 세째 아들 안룽은 어머니 양카이후이가 1930년 11월 후난(湖南)군벌에 살해된 데 이어 공산당 상하이 지하당 조직이 파괴된 후 상하이 거리를 전전하다 실종됐다.

양카이후이가 사망하기 전인 1928년 마오쩌둥과 결혼한 세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 1985년 4월 사망)은 1929년부터 10여년 사이에 무려 6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대부분 일찍 사망하거나 당시 어려운 시대상황 탓에 서로 헤어져 행방불명됐다.

홍군이 푸젠(福建)성 룽안(龍巖)을 두번째 함락시켰을 때인 1929년 3월 딸이 태어났으나 혁명 승리 후 찾기로 하고 다른 집에 수양딸로 보내는 바람에 헤어졌다.

1932년에 낳은 아들 안훙(岸紅)은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탄(毛澤覃)의 집에 맡겼으나 마오쩌탄의 사망으로 행방불명됐다.

1933년 다시 임신한 허쯔전은 홍군을 따라, 지금은 공산혁명의 성지가 된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을 따라 대장정을 하던 중 조산해 요절했고, 1935년 2월 귀이저우(貴州)성의 한 백묘(白苗)족 마을에서 낳은 딸은 현지의 동향인에 맡겼으나 역시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현재 허쯔전의 친딸로서는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리민(李敏)은 홍군이 섬북(陝北)지방에 도달한 후인 1936년 겨울에 태어났다.

그녀의 첫 이름은 자오자오(교교<女+交>)였으나 1947년 아버지 마오쩌둥이 당시 자신의 가명 리더성(李得勝)의 리를 따서 리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37년 마오쩌둥과 미모의 배우 출신 통역원 우광웨이(吳光維) 간의 스캔들로 이혼한 허쯔전은 신병 치료와 공부를 위해 1937년 10월 구 소련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아들을 낳았으나 10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리민의 이복 동생 리너(李訥)는 1939년 마오쩌둥과 결혼한 문화대혁명의 주역 장칭(江靑)이 1940년 8월에 낳은 딸. 본명이 리윈허(李雲學)인 어머니를 따라 리 성을 갖게된 그녀는 1966년 베이징대 역사학과 졸업 후 해방군보사 편집기자로 일하다 1970년 장시성 57간부학교로 하방돼 노동을 하기도 했다.

(베이징연합뉴스) 이돈관 특파원 d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