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천이백이십삼번/죄인의 옷을 걸치고/가슴에 패를 차고/이름 높은 서대문 형무소/제 삼동 육십이호실/북편 독방에 홀로 앉아/'네가 광섭이냐'고/혼잣말로 물어보았다." 시인 김광섭이 허리가 꼬부라지고 등이 시린 겨울을 보내고, 파김치 같이 추근한 마음으로 여름을 살았던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수감생활 중 지은 '죄(罪)'라는 시다.

서대문 형무소는 흔히 '민족의 수난처'로 치부된다. 원래 건립부터가 우리의 의병이나 애국지사,항일투사 등을 투옥하기 위해서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계기로 수많은 인사들을 잡아들이면서 감방이 부족하자,1907년 무악재 고개 밑에 근대식 감옥을 지었다. 계속 옥사를 증축해 1930년대 중반에는 수용인원이 3000여명으로 늘어났는데 '명당 중의 명당이나 삼천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고 한 무학대사의 예언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서대문 형무소는 3·1운동과 인연이 깊다. 손병희 한용운 등 민족대표 대부분이 이곳으로 끌려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고,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붙잡혀 온 유관순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 옥사했다. 많은 양민들 역시 '사람과 뾰족한 흉기를 함께 넣고 흔드는' 고문상자 속에서 비명을 질러대야 했다.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서대문 형무소가 만들어진 지 80년. 올해 3·1절에는 이곳에서 갖가지 체험행사가 열린다. 독립운동 당시의 옷을 입은 채 태극기를 들고서 만세를 부르고,암울한 감옥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역사관 곳곳을 돌며 '고난 체험'도 한다.

지하 옥사에서는 새로 바뀐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한다. 오는 5월27일까지 계속되는 '순국선열 추모 이어가기' 행사도 뜻 깊게 느껴진다.

국가와 민족의 명운이 걸린 역경 속에서도 우리 선인들은 결코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오늘 지는 태양이 슬프지 않은 건 내일 또다시 떠오를 태양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