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차라리 지옥이었습니다"

"돈으로 찢겨진 내 영혼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온갖 고초와 수모를 당했던 할머니들은 15일 미국 하원 외교위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에 증인으로 출석, 엉그러진 한(恨)과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절규하면서 손으로 가슴을 쳤다.

하원 레이번빌딩에서 열린 청문회장에는 한국과 일본, 호주 등 외국 기자들과 참관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고, 미 언론들도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일본측은 "지난 1996년 이후 하시모토, 오부치, 모리, 고이즈미 총리 등이 직접 나서서 보상금과 함께 서면으로 진실한 사과를 했다"는 요지의 서면 해명서를 위원회에 제출, 위안부 결의안 저지에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 이용수 할머니 "구타와 고문, 강간으로 점철된 3년"

첫 증인으로 나선 이 할머니는 "나는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설움이 북받치는 듯 "제가 겪은 일들을 꼭 얘기해야 하는데 너무 부끄럽다"며 이내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하나하나 고발했다. 성노예로 지낸 한많은 세월들도 털어놨다.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유모로 일하는 어머니 대신 동생을 돌보며 면사공장에 다니다가 16세이던 1944년 군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갔다.

2층으로 된 일본풍의 대만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강간으로 첫 순결을 잃은 뒤 강제 성추행을 거부하는 자신을 전기 쇼크 등 온갖 폭행과 고문으로 학대한 사실을 증언하면서 치를 떨었다.

당시 위안소는 방이 20개쯤 있었고, 도주하려다 잡혀 온갖 폭행을 당했으며 잡곡과 쌀죽으로 연명하며 생명을 이어왔다고 증언했다. 일본군 중 한명이 자신에게 '도시코'란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 이후 자신은 위안소에서 '도시코'란 이름으로 통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더욱이 자신이 끌려간 장소가 대만의 신주라는 사실도 잠자리를 같이한 일본군이 뇌까리는 말 속에서 알게 됐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군들은 개돼지 보다도 더 추악했고, 한국말을 하면 폭행당하기 일쑤였다"며 몸서리를 쳤다.

종전 후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죽은 딸이 귀신으로 나타났다"면서 "귀신인지 아닌지 나를 깨물어 몸에 피가 나기도 했으며, 아버지는 그해 중풍으로 돌아가셨다"며 비운의 인생사를 털어놨다.

이 할머니는 "만행을 저지른 일본을 그냥두지 않을 것"이라며 "세계 성폭력 만행을 뿌리뽑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반드시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김군자 할머니 "내 가슴속 기억들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열여섯살때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의 성노리개가 돼야했던 김 할머니는 "기전에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땅까지 오게됐다" 당시의 참상을 털어놨다.

김 할머니는 "내 몸에는 너무나 많은 흉터들이 남아있고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다"면서 "일본 정부는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또 "이제 많은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죽었지만 역사는 살아있을 것"이라며 "돈으로 망가진 내 인생을 보상할 수 없다"고 절규했다.

아울러 고착 첫날 저항하다 맞아 왼쪽 고막이 터졌고 하루에도 수십명을 상대해야 하는 고통을 참지못해 도망치다 붙잡혀 호되게 폭행당했으며 3년동안 여러차례 자살을 시도하는 등 죽지못해 살아야 했던 과거를 전했다.

해방과 함께 다시 여러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했던 남자와 재회했지만 상대 집안의 반대속에 남자가 자살했고 당시 임신해 낳았던 딸은 5개월만에 숨지면서 김 할머니는 이제껏 혼자 살아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