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斗植 <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dskim@shinkim.com >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비즈니스에서 거래조건을 꼬치꼬치 따지기를 꺼린다.

큰 조건만 잘 챙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문구(文句) 하나하나까지 따지면 쪼잔한 사람으로 비쳐질까 신경 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계약서는 매우 간단하다.

수십억원짜리 집도 한 장짜리 계약서로 거래하고,수백억원 상당의 기업을 사고 파는데도 단 몇 장짜리 합의서만 쓰고 마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대범한 계약관행은 사람 관계에서 합리성보다는 신뢰와 의리를 중요시하는 민족성에 기인하는 것 같다.

화폭을 다 칠하지 않고 무언가 여백을 남겨 두는 것을 멋스럽게 생각하는 동양적 사고방식도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쁘게 본다면 치밀하지 못한 성격,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적당히 해결하면 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이와 같이 '디테일'에 약한 계약 관행을 지탱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계약서를 쓸 때 '그 까짓거 서로 믿고 하면 됐지 계약서가 무슨 소용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서로 신뢰하고 그 신뢰가 지속되는 한 계약서는 불필요하다.

믿는 사이에 큰 문제가 생길 리 없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원만히' 해결하면 되니까.

신랑 신부는 자신들의 결혼이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이지,주례의 성혼(成婚)선서로 결혼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의 사랑과 신뢰가 계약문서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계약서는 '사랑''신뢰'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신뢰가 깨졌을 때를 대비하여 당사자들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정리할 '룰'을 정하는데 합의서의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계약서는 좋은 관계를 맺는 요식행위가 아니라,오히려 관계가 깨질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합의서를 쓸 때는 악수하고 축배를 드는 좋은 분위기는 바로 잊어버리고,오히려 서로 고함치고 삿대질하는 '불신'의 관계로 발전할 경우를 생각하며 오해와 이견(異見)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밀하게 계약서를 작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법률실무를 하다 보면 계약 해석을 둘러싼 분쟁은 피를 나눈 형제간이나 부부간에도 발생한다.

사고방식이 같다고 하여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다.

하물며 오늘날은 생각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거래하지 않는가.

문화가 다른 당사자들 간의 계약일수록 더 세밀하고 정확해야 한다.

'디테일'이 엉성하면 앞에서 조금 이득을 보는 것 같지만 뒤에서 곱배기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냉혹한 경제전쟁에서는 큰 줄거리뿐만 아니라 디테일도 꼼꼼히 챙기는 계약관념이 바로 경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