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맞벌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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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八道 < 코리아랜드컴패니 회장 jpdhongin@hanmail.net >
우리나라 여성의 삶은 오랫동안 아내와 며느리라는 울타리 안에 묶여 있었다. 여자란 '시집가서 아이 낳고 살림 잘하며 남편과 시어른 공경 잘 함으로써 좋은 아내 훌륭한 며느리로 사랑받는 것이 제일'이라고 여겨졌던 탓이다. 심지어 대학졸업장이 학력이나 실력 증명서가 아닌 결혼 자격증이 돼버릴 정도였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결혼 전 잠시 경험을 쌓기 위한 것 내지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많은 여성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못하거나 애써 취업해도 결혼 혹은 출산 뒤엔 그만둬야 했다. 수많은 여성이 자유로운 직업 선택이 가능했던 남성과 달리 자신의 뜻을 펴지 못했던 것이다.
여성 인력을 이처럼 사장(死藏)시킨 데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은 엄청날 게 틀림없다. 각 가정에서 딸들의 교육에 들인 비용과 등록금을 환산하면 아마 천문학적 액수일 것이다. 진작부터 여성들이 갈고 닦은 지식을 잘 활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이제부터라도 사회와 국가 모두 좀 더 신경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여성이 결혼 후 맞벌이를 하자면 물론 고달프다. 아내가 직장생활을 했기에 나는 그 고충을 알고도 남는다. 아내는 1967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 국무부 소속 기관인 AKF에서 유학생 토플시험 주관 업무를 맡아 10년간 근무했다. 당시 AKF 총재는 미8군 사령관과 유엔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다니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출근하려면 아이가 낮 동안 먹을 우유와 간식 준비해야지,큰 아이 학교준비물 챙겨야지,퇴근 후엔 슈퍼 들러 저녁거리 구입해야지 한마디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애쓴 덕에 은행 적금은 나날이 불어났고 그 돈은 사업 초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내가 가정과 직장생활에 충실하니 나 역시 남편으로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게 돼 금실은 더 좋아졌다. 큰 아이는 방과 후 일찍 집에 와 동생과 놀아주는 것을 당연시하고 동생 역시 누나를 기다리게 돼 우애가 깊어진 것은 물론 둘 다 자립능력을 키우게 됐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였다. 아내의 퇴직금은 서울대 총동창회 특지장학금의 종자돈이 됐다. 자녀 한 명을 대학 졸업 때까지 키우자면 2억원이 든다는 마당이다. 은퇴 후 노후자금까지 생각하면 남편 혼자 버는 외벌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쯤 되면 맞벌이가 선택 아닌 필수가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마땅하지 않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
눈높이를 낮춰 기회를 얻은 다음 능력과 역량을 쌓으면 충분히 제 몫을 다하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러자면 임신과 출산 육아에 따른 문제를 여성과 개인 가정에 전담시키지 말고 국가와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여성의 삶은 오랫동안 아내와 며느리라는 울타리 안에 묶여 있었다. 여자란 '시집가서 아이 낳고 살림 잘하며 남편과 시어른 공경 잘 함으로써 좋은 아내 훌륭한 며느리로 사랑받는 것이 제일'이라고 여겨졌던 탓이다. 심지어 대학졸업장이 학력이나 실력 증명서가 아닌 결혼 자격증이 돼버릴 정도였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결혼 전 잠시 경험을 쌓기 위한 것 내지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많은 여성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못하거나 애써 취업해도 결혼 혹은 출산 뒤엔 그만둬야 했다. 수많은 여성이 자유로운 직업 선택이 가능했던 남성과 달리 자신의 뜻을 펴지 못했던 것이다.
여성 인력을 이처럼 사장(死藏)시킨 데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은 엄청날 게 틀림없다. 각 가정에서 딸들의 교육에 들인 비용과 등록금을 환산하면 아마 천문학적 액수일 것이다. 진작부터 여성들이 갈고 닦은 지식을 잘 활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이제부터라도 사회와 국가 모두 좀 더 신경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여성이 결혼 후 맞벌이를 하자면 물론 고달프다. 아내가 직장생활을 했기에 나는 그 고충을 알고도 남는다. 아내는 1967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 국무부 소속 기관인 AKF에서 유학생 토플시험 주관 업무를 맡아 10년간 근무했다. 당시 AKF 총재는 미8군 사령관과 유엔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다니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출근하려면 아이가 낮 동안 먹을 우유와 간식 준비해야지,큰 아이 학교준비물 챙겨야지,퇴근 후엔 슈퍼 들러 저녁거리 구입해야지 한마디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애쓴 덕에 은행 적금은 나날이 불어났고 그 돈은 사업 초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내가 가정과 직장생활에 충실하니 나 역시 남편으로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게 돼 금실은 더 좋아졌다. 큰 아이는 방과 후 일찍 집에 와 동생과 놀아주는 것을 당연시하고 동생 역시 누나를 기다리게 돼 우애가 깊어진 것은 물론 둘 다 자립능력을 키우게 됐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였다. 아내의 퇴직금은 서울대 총동창회 특지장학금의 종자돈이 됐다. 자녀 한 명을 대학 졸업 때까지 키우자면 2억원이 든다는 마당이다. 은퇴 후 노후자금까지 생각하면 남편 혼자 버는 외벌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쯤 되면 맞벌이가 선택 아닌 필수가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마땅하지 않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
눈높이를 낮춰 기회를 얻은 다음 능력과 역량을 쌓으면 충분히 제 몫을 다하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러자면 임신과 출산 육아에 따른 문제를 여성과 개인 가정에 전담시키지 말고 국가와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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