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일요일 밤 10시. 새 연속극이 시작됐다. 의학드라마라는 간판을 내건 MBC TV의 '하얀 거탑'. "요즘엔 의사를 주인공 으로 내세우는 게 유행인가." 시큰둥한 심정으로 보던 중 깜짝 놀랐다. 수술 장면은 리얼하고,인술과 출세를 둘러싼 의사의 갈등은 그럴 듯하고,조직의 권력구조를 둘러싼 복잡미묘한 관계 묘사는 치밀했다.

아니나 다를까. 1·2회 방송 이후 여기저기서 "썩 괜찮다"는 평이 쏟아졌다. 또 다시 놀란 건 원작이 일본소설이라는 사실. 야마자키 도요코의 1969년작으로 일본에서 78년과 2003년 두 번이나 극화됐다는 것이다. "어쩐지. " 입맛이 썼다. 국내 영상물이 일본 소설이나 만화,드라마의 원작을 차용하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올드 보이'의 토대는 알려진 것처럼 일본만화다.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드라마 '봄날''연애시대',연초 대박작 '미녀는 괴로워' 모두 일본 판권을 사들여 만든 것이다. 제작중인 영화 원작도 상당수가 일제(日製)다. 급증하는 영상콘텐츠를 국내 창작물로만 채우기는 힘들 것이다. 원작이 뭐든 잘 주물러 역수출하면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에 따르면 하나의 예술품에 의해 창출된 가치는 다양하게 원용돼 새로운 유효가치로 전환된다고 한다. 문화가 산업으로 바뀌는 근거다. 실제 소설이나 만화가 영상물화되기도 하지만 거꾸로 영상물이 뜨면 만화나 소설이 팔린다. '봄날'의 원본이라는'별의 금화'가 책으로 나오는 식이다.

'미녀는 괴로워'의 경우 만화로도 충분히 판매됐다는 마당이다. 일본 대중소설이 젊은층을 파고든지 오래이고 보면 우리가 '겨울연가'에 따른 일본내 한류 바람에 취해 있는 동안 일류(日流)는 소리 소문 없이 우리 문화시장의 저변을 훑고 있는 셈이다. 이런데 국내 영상콘텐츠업계의 일본물 의존은 갈수록 심화되는 것이다.

영상콘텐츠의 성공요소는 여러 가지다. 뛰어난 연출,탁월한 연기,고도의 촬영기술,수준높은 컴퓨터그래픽,근사한 배경·장치·의상 등.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원작(原作)'이다. 전달하려는 주제를 흥미로운 스토리에 담아 탄탄한 구성과 적확한 대사로 엮어낸 '대본'이 있어야 '작품'이 되는 것이다.

수많은 채널과 국경없는 인터넷은 사람들의 '눈'을 높였다. 아이디어와 기획만 갖고 그때그때 흐름에 따라 꿰맞추거나 과거 히트한 작품을 적당히 재구성하는 식으로는 더이상 국내는 물론 해외 시청자나 관객의 마음도 잡기 어렵다. '이대로 가면 한류(韓流)는 지나간 꿈이 될지 모른다'는 주장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안그래도 일본 지상파방송사의 한국 드라마 편성은 급감했고 지난해 영상물 수출 또한 2005년보다 눈에 띄게 줄었다. 중국과 대만의 한국드라마 만족도도 떨어지고,한류관광객도 하락 추세다. 반한(反韓)감정,작품값 상승,현지 제작자 반발 등도 이유라지만 콘텐츠 참신성 저하가 보다 큰 요인으로 꼽힌다.

"누군 일본 원작에 매달리고 싶어서 매달리나. 국내 창작물이 부족하니까 그렇지" 혹은 "시청률에 모든 게 좌우되는데 모험을 어떻게 하나. 인기가 검증된 게 낫지"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험 없이 변화는 없고,변화 없이 발전은 없다. 다양한 국내 창작물을 발견,육성하려는 노력 없이 더 이상의 한류는 없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