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산골마을 '생오지'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시간의 흐름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어제 같은 오늘,오늘 같은 내일의 변함없는 일상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버스도 들어오지 않고 구멍가게 하나 없는 오지마을의 2006년 마지막 날은 여전히 평화롭고 고즈넉한 은빛세상이 펼쳐져 있다. 크리스마스트리 대신에 마당 앞 소나무에는 설화(雪花)가 피어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눈가루가 불불 날린다. 모든 것이 1년 전 그대로다. 어김없이 새벽 그 시간에 정확하게 홰를 치며 우는 닭 울음소리에 잠이 깨어 마당에 나가보니 고라니 한 마리가 느럭느럭 지나가고 산비둘기들이 떼지어 내려와 먹이를 찾고 있다. 변함없는 세상이 마냥 여유롭고 아름답다.

나는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생각해본다. 이 세상의 모든 흐름에는 매듭이 있다. 시간도 그렇고 인생에도 매듭이 있는 것 같다. 잠시 흐름을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 매듭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매듭은 정류장과도 같다. 미지의 낯선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멈춰 있는 지점. 우리는 지금 2007년의 출발을 위해 2006년의 마지막 정류장에 와 있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뒤돌아보며 가슴 설레는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은 조용히 헐벗은 마음을 다독이고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볼 때다. 용기 있는 사람은 앞만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뒤를 돌아볼 줄 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출발을 앞둔 지금 우리는 보다 아름다운 시작을 위해서,앞을 바라보기 전에 잠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생애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 하루,단 한 시간,아니 단 10분이라도,자신의 삶을 반추(反芻)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루 중에서 세상의 색깔이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시간이 일몰 직전이듯이,1년의 삶을 진솔하게 반추해볼 수 있는 시간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단 한번이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을 위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나눔의 미덕을 실천한 적이 있는가. 오늘 하루 눈을 감고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어렸을 적 어른들로부터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이 먼다"는 말을 듣고 잠들지 않으려고 두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팽팽하게 잡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어른들의 이 말 역시 지난 삶을 반성하고 새해의 계획을 잘 세우라는 의미일 것이다.

지난 1년 우리는 마치 맨발로 뜨거운 모래밭을 뛰어온 것 같다. 쫓기듯 허겁지겁 불안하게 살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꿈을 잃어버렸다. 경제 불황의 늪에 빠진 채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졌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갈등의 첨예한 대립을 보아왔다.

기대와 희망은 검은 그늘에 가려졌으며 여기저기서 살기 힘들다는 절규가 터져 나왔다. 기대했던 지도자들은 아집과 편견에 매몰된 채 양보와 포용,상생의 미덕을 스스로 짓밟아버렸다. 그 사이 부동산값은 춤을 추었고 빈부 격차는 조율(調律)할 수 없을 만큼 틈이 커져버렸다. 도전정신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할 젊은이들은 용기를 잃고 방황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가 하면 보혁(保革) 갈등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져 국민통합은 어렵게 됐고 통일논의는 더욱 멀어졌다.

이 같은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나라의 명예를 드높이고 우리민족의 자존을 살렸는가 하면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을 감싸안아준 아름다운 일들도 많았다. 이들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희망의 보따리를 매고 빛나는 출발을 서두를 때다. 시간에는 끝이 없다. 다만 쉼표를 하나씩 찍어갈 뿐이다. 그러기에 끝은 바로 시작과 같다. 산다는 것은 의미 있는 쉼표를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이다. 2006년에 드리워졌던 무채색의 그림자 위에 2007년의 아름다운 물감을 칠한다면 지난해는 분명 의미 있는 추억이 될 것이다.

문순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