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明鉉 < 고려대 교수·경영학 >

얼마 전 경제부총리,산업자원부 장관,공정거래위원장이 모여 합의한 출자총액제도 및 순환출자(循環出資)에 관한 정부안(案)을 여당 일각에서 강하게 반대하고 나섬에 따라 이에 대한 논의가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게 됐다. 도입하지 않기로 한 순환출자 규제에 대한 불씨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 문제에 관한 여당과 재계의 소모적 논쟁을 또다시 지켜봐야겠지만,이제는 출자총액제한에 관한 한 우리 기업들을 좀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순환출자 역시 재벌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측면보다는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부채비율 200%'라는 정치경제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에서 생성되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순환출자는 또 현대그룹처럼 형제간의 분가(分家) 과정에서 생겨난 측면이 훨씬 더 강한 만큼 이를 단시간 내에 강제적으로 해소(解消)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규제 중 출자총액 제한제도만큼 논란이 분분한 제도도 그리 많지 않다. 출총제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막고 무분별한 문어발식 다각화에 따른 경영부실을 방지하여 궁극적으로 국가경제의 위험을 감소시킨다는 취지로 1980년대에 만들어졌다. 그후 이 제도는 외환위기 당시 기업투자 활성화(活性化)의 명분으로 한시적으로 폐지되었다가 2002년 다시 부활됐다. 하지만 재계의 계속되는 폐지 요구와 정부의 제도 고수 방침으로 인해 많은 갈등과 논쟁을 자아내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는 출총제의 보완적 유지를 찬성해 왔지만 이제는 이 제도의 폐지를 전향적(前向的)으로 생각해야 할 여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출총제 폐지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인 재벌의 지배구조가 상당히 개선돼 가고 있다. 물론 두산과 현대차 사태에서 본 것처럼 지배구조상의 문제가 있는 재벌도 있지만,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경영환경에서 재벌의 지배구조는 전반적으로 개선(改善)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소버린 사태에서 보듯이 적대적 M&A시장의 규율 기능이 강화되면서 이제는 후진적 지배구조로는 아무리 재벌이라도 더 이상 경영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더 나아가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들의 경영방식이 바뀌기 시작해 이제는 외형 위주의 선단식(船團式) 경영이 아닌 '선택과 집중'에 의한 수익중시 경영이 경영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았으며 무분별한 다각화는 옛말이 됐다. 따라서 정부는 출자총액제한제도의 과감한 폐지를 통해 이 제도에 대한 더 이상의 불필요한 논쟁을 불식시켜야 할 것으로 보인다.

순환출자해소에 관해서도 정부·여당은 좀더 전향적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환상형(環狀型) 순환출자의 폐해로는 '가공(架空)자본의 창출'과 재벌의 '경영권 방어수단으로의 이용'이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가공자본의 개념은 단지 관념일 뿐이다. 자본이 없는 기업은 존재할 능력도,존재할 가치도 없으니 굳이 기업들이 가공자본으로 이뤄진 자회사를 만들어 낼 이유가 없다.

순환출자가 재벌의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비난할 수 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순환출자가 외국계 투기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보호해주고 있는 재벌의 유일하고도 현실적인 방어수단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현행법상 허용되고 있는 경영권 방어수단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비록 효율적인 방어기제(mechanism)는 아니지만 순환출자가 경영권의 방어막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순환출자 해소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정부·여당은 우선적으로 효율적 경영권 방어제도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재벌 규제와 관련된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 우리 기업들이 성장엔진 확보를 위한 투자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중지(衆智)를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