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秉柱 <서강대 명예교수 >

막스 플랑크(1858∼1947)는 양자이론을 창시하는 등 다수의 학문적 업적을 쌓으면서 걸출한 제자들을 길러낸 독일 학자로서 20세기 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한 몇 사람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나치 치하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한 양심적 학자의 풍모가 돋보였고,막내 아들이 1944년 히틀러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처형 당하는 등 가족적 불행을 꿋꿋이 견뎌내며 학문에 정진한 강한 의지와 인내의 화신이기도 했다.

이렇게 탁월한 지성과 인간성의 소유자인 그가 남긴 말 가운데 경제학도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말이 있다. 경제학을 공부하려고 생각했는데 "너무 어려워" 포기했다는 말이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분석철학을 개척(開拓)한 철학자,논리학자,사회비평가,수필가 등 다방면에서 이름난 20세기 대표적 영국 지성으로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차 대전 때는 양심적 징집거부로 투옥된 적도 있으나,2차 대전 때는 반독재 전쟁으로 여겨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60년대에는 반핵운동가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너무 쉬워" 경제학 공부를 그만 두었다는 말은 경제학도를 무안케 만든다.

지난 세기 지성의 거목 두 사람이 경제학을 왜 이렇게 상반되게 평가했을까? 아마도 경제학은 계측 불가능한 변수가 많이 작용하고 자연과학처럼 통제된 상황하에서 실험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경제학이 난해하다는 플랑크의 겸손한 평가가 이해된다. 경제학이 사용하는 분석기법이 물리학의 고전적 틀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고 보면 신기할 게 없다는 차원에서 수리철학자 러셀에게는 평이하게 보였을 것이다. 분명 경제학은 다양하다.

20세기를 빛낸 경제학계 인물 가운데 J M 케인스(1886∼1946)와 M 프리드먼(1952∼2006) 만큼 큰 영향을 미친 학자는 드물다. 케인스는 자본주의 경제권이 대공황의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 정부가 재정지출을 동원해야 할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살려낸 구원자라는 평가가 있다. 반면에 자유주의 관점에서 보면 정부의 적극적 시장개입을 권장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를 뒷문으로 슬쩍 도입했다는 비판을 내리게 되었다.

케인스 경제학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 학계(사실상 세계 학계)를 압도해 주류(主流)를 형성할 즈음 필마단기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람이 프리드먼이었다. 그는 재정정책이 경기순환을 가라 앉히기 보다는 오히려 부추기기 때문에 통화공급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다. 케인스가 정책당국의 재량을 권고한 반면 프리드먼은 당국의 재량 폭을 줄이고 일정한 규칙 지키기를 주창(主唱)했다. 간추려 말하면 경제를 시장의 자유경쟁에 맡기는 쪽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쪽보다 낫다는 얘기다.

경제학의 두 거인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자유주의적 신념,총수요 중시 등이 그랬다. 둘 다 현실 경제문제에 고심했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기에 논쟁하는 가운데 통합이론이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선진국의 학문진보가 이루어졌고,정책 실효성이 높아져 국민후생이 증진됐다.

서울에서는 한·미FTA 문제,부동산 문제 어느 것이고 권력핵심부의 주장에 동조하면 동지이고,반대 주장을 펴면 적으로 치부된다. 요즘 서울 도심은 시위대에 점령당하고,시민은 교통마비와 소음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 이슈 해결에 전문가가 개진하는 의견의 논리보다 거리를 메우는 이익집단 시위대의 아우성과 확성기의 굉음이 유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학계에서는 대부분 외국 전문지에 논문 실리기 바빠 한국 현실을 외면해야 한다. 일부는 아직도 19세기 마르크스(1818∼1883)나 헨리 조지(1839∼1897)의 책에 심취해 있고,이들의 영향이 지대하다. 거리를 메우는 시위대의 물리적 힘에 경제 논리를 제압하는 소인배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