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의류사업을 하는 김모 사장의 명함엔 만리장성 그림이 새겨져 있다. 한자이름과 나란히 써있던 한글이름은 작년부터 지웠다. 예전에는 한국기업인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히려 좀더 중국인과 가깝게 지내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몇년 전만 해도 전화 한 통화면 시장이나 성장도 쉽게 만났는데 이제는 꿈도 못꿉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의 중국법인 대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시장은커녕 정부부처의 국장급 인사를 만나려고 해도 요새는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중국에서 한국기업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고 있다. 몇년 전만 해도 중국은 투자주체인 한국기업을 유치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 아쉬운 쪽이 되고 있다. 이는 당연히 중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진데 따른 결과다. 미국과 중국의 G2시대가 열렸다는 평을 받을 만큼 강해진 경제력 앞에 한국기업이 작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기업이 이 같은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중국은 지금 엄청난 변화의 시동을 걸고 있다.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중국기업의 글로벌화를 추진중이다. 그러나 한국기업은 여전히 중국을 하나의 생산기지로만 생각하고 있다. 낮은 임금 덕에 투자하면 실패의 가능성이 작은 곳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짙다. 돈보따리를 들고 무작정 중국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또 예전과는 달라진 대접을 두고 중국인들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하지만 이것은 외자의 이용방식을 달리하기 시작한 중국정부의 전략변화를 읽지 못한 탓이다. 이제부터는 중국이 원하는 기술과 노하우를 줄 수 있어야 중국의 환영을 받는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중국기업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중국이 최근 일본과 관계를 빠르게 복원시키고 있는 것은 양측이 서로 원하는 시장과 기술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한국정부나 기업들은 일본에 비해 이 같은 전략을 짜는 게 뒤떨어진다"고 꼬집었다.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발붙일 곳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걱정을 지울 수가 없다.

베이징=조주현 특파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