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惠淑 < 이화여대 대학원장 hsllee@ewha.ac.kr >

앨빈 토플러가 1990년대에 예견한 대로 '지식'이 21세기의 자본역할을 하고 있는 지금,지식 창출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특히 교육열이 높은 우리가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을 만한 탁월한 이론이나 지식을 창출한 적이 있었는지,또 앞으로 해낼 준비는 돼 있는지 종종 자문해 본다.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된 줄기세포,복제,인공지능 로봇,우주여행,양자컴퓨터 등 여러 분야는 과거와 달리 유기적인 지식 통합과 접근 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융합과학이 강조되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가 모인 대학에 거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대학들은 아직 이런 기대에 적절히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으로 여전히 문과 이과를 나누고,현대 학문의 역동성을 감안하지 못한 학문분류 체계를 불변의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고,행정·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특히 교수는 주 소속을 한 전공에만 둬야 한다는 정부의 방침도 융합학문 발달을 저해하는 한 요소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내의 융합학문 발전을 가로막는 더 큰 요인은 풀뿌리적인 학술교류의 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규모 행사 위주의 학술대회는 아무리 많아도 장기적인 지식 창출의 원동력은 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아이디어가 수렴된 창의적인 이론이나 발견은 전문가와 학생들이 함께 모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격의 없이 주고받고 토론하는 학술교류의 장에서 나왔다.

여기 풀뿌리 콜로키엄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학문이,새로운 이론이 태동하는 작지만 놀라운 현장을 경험하고,지적탐구의 재미에 빠져드는 것이다.

일례로 괴팅겐대학의 여성수학자 에미 뇌터는 유럽 곳곳에서 모여든 학자,학생들로 유명한 풀뿌리 집단,'Noether's boys'와 학술모임을 열었다.

히틀러에 의해 퇴출된 후에도 이 모임은 뇌터의 아파트에서 계속돼 추상대수학이라는 큰 수학이론 탄생의 시금석(試金石)이 됐고 나아가 아인슈타인 등 물리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현대 물리학에도 큰 기여를 했다.

대형 학술대회나 대규모 연구에 대한 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내 모든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적어도 매주 한 번 이상씩 풀뿌리 콜로키엄이 열릴 수 있게 제도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역동적인 학술 아이디어 교류의 장이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열릴 때,인재를 키운다는 고귀한 가치가 천명되고 더 이상 보고서를 장식하는 통계 숫자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때,비로소 우리나라에서도 인류에 공헌할 지식 창출이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