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12 군사쿠데타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진압,이어진 신군부 세력의 집권과 제5공화국 탄생이라는 격동의 현대사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이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 숨을 거뒀다.

결국 이들 사건의 진상도 최 전 대통령만의 비밀로 남은 채 역사 속에 묻힐 전망이다.

최 전 대통령은 12·12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쿠데타를 목적으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씌워 연행하기 위한 재가를 요청했으나 이를 허용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합수부는 재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정 총장을 강제로 체포, 연행했고 다음날 최 전 대통령이 이를 재가했다고 주장,이후 문민정부 시절 이뤄진 관련 사건의 재판에서 최대 쟁점이 됐다.

하지만 최 전 대통령은 1996년 11월 당시 2심 재판에서 구인장까지 발부받아 강제로 법정에 서기는 했으나 증언은 끝내 거부했다.

그는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의 국정 행위에 대해 후일 소(訴)하거나 증언하는 일은 있어서 안 된다.

이런 이유로 헌정 사상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하는 유례가 없었는데 본인이 그 사례를 만든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입을 다물었고 재판은 40분 만에 끝났다.

대법원은 결국 "신군부 세력의 주장대로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 총장이 이미 체포되고,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이뤄진 것으로 '사후 승낙'에 불과해 신군부의 반란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최 전 대통령의 명시적 진술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정황 분석과 추론으로 쿠데타 기도에 대한 법적 논란을 비켜간 것이다.

최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신군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벌였던 일련의 행위와 이후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해서도 함구로 일관했다.

실제로 당시 대통령 의전일지 등에 따르면 신군부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이후 같은 달 31일까지 최 전 대통령이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각료,군 관계자 또는 민간인을 면담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 1980년 8월1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난 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향해 '지지연설'을 한 것이나 신군부 세력이 12·12사태 이후 대통령 간선제를 요구하자 최 전 대통령이 개헌 일정을 대폭 늘려 잡은 것 등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1996년에는 미국의 관련 비밀 문건을 근거로 최 전 대통령이 미국측으로부터 대통령 선출 직전 약 1년만 재임할 것을 요구받기도 했으며,재임 후 개헌을 추진했지만 곧 이은 퇴진으로 성사되지는 못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 때문에 최 전 대통령에 대해 일부에서는 신군부가 자행한 정권 탈취 음모의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신군부의 집권을 묵인 또는 방조했다는 평가도 내리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9년 회고록에서 최 전 대통령에 대해 "헛된 욕심과 좁은 시야에 갇혀 민주화를 지연시켰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최 전 대통령의 '집념'에 가까운 침묵 때문에 메아리 없는 주장에 그치고 말았다.

정치권에서는 그러나 혹시 '회고록 정도는 남기지 않았을까'라는 추측과 함께 최 전 대통령이 거의 집필을 끝낸 뒤 자신의 사후에 공개토록 지시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최흥순 최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회고록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이를 부인했다.

다만 "개인적 메모는 혹시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