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相衍 < 한국세큐리트 대표 sangyeoncho@hanglas.co.kr >

19세기 말 한때 과학자들은 세상의 과학적 진리를 거의 다 파헤친 것 같이 여긴 시절이 있었다.

머지않아 인류는 우주의 마지막 진리마저 다 이해할 것 같았고 모든 것이 시간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20세기 초 확립된 불확정성 이론과 양자역학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의 철학적 인식에 큰 변화를 주게 됐다.

우리가 아무리 정확히 아주 작은 소립자의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려 해도 근본적인 물리적 한계 때문에 어느 선 이상은 원리적으로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하며,단지 확률로만 기술(記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률로만 기술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실재(實在)가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 개의 소립자가 여기에 30% 존재하고 동시에 저기에 70% 존재한다는 식이다.

이런 것은 우리의 경험과는 상반되므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둔 양자역학은 실제로 훌륭히 작동하며 첨단 공업에 실질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의 고정된 사고(思考)를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이나 사상은 수용하기 어려우며 극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물론 새로운 개념이나 사상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그 내용은 철저히 검증돼야 한다.

물리학자들조차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일 때 이처럼 주저하는데 하물며 우리 사회가 기존의 고정된 사고를 뛰어넘는 새 의견이나 개념을 수긍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무척이나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2300여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운동에 관한 터무니없는 이론이 16세기 말 갈릴레오의 운동론이 나올 때까지 수천년간 널리 받아들여져 온 것도 그래서 이해가 가는 일이다.

우리는 단순히 관습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순된 관행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무의식적으로 하며 살지는 않는가? 고정된 사고를 뛰어 넘는,받아들이기 어려운 의견이나 이론도 타당하다면 수긍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비단 과학자만의 일이 아니며 가정이나 학교,그리고 사회에서도 우리 생활에 시사하는 바 크다.

그러기에 수천년 전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도대체 우리 기성세대와는 다르다"며 불평을 했다는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