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긴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상법개정안이 발표됐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다. 당연한 것을 왜 이제 하나 싶을 정도다. 기업이란 존재는 틈만 나면 불법을 저지를 궁리만 하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겠다는데 이의를 달 수 없다. 기업가라는 인간들은 또 언제나 개인 치부만 생각하고 있으니 감시망을 더욱 치밀하게 만들어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얽어 놓는 것이 지당하다. 그러기 위해 이중대표 소송제와 집행 임원제를 도입해 기업 경영자들을 무차별적으로,그리고 수시로 법정에 불러세울 수 있도록 하고,특히 회사기회 유용금지 등을 규정해 명색이 기업이라면 오로지 주식투자자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는 구조를 공고히 하는 것이 바람직할 터다. 좋게 말해 엄벌주의요,희극적으로 표현하면 소위 '차카게 살자'는 엄포다.

그러니 이번 상법개정안에 시비를 건다면 이는 기업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음모의 예비에 다름 아니다! 그래,맞다! 상법은 그렇게 확실히 개정하자. 마침 연휴가 끝나면서 정기국회도 문을 열었다. 언제나 기업가 혼낼 궁리만 해오신 의원님들께서 의당 속전속결로 잘 통과시켜 주실 것이다. 그리되면 부패한 기업가는 모습을 감출 것이고 기업 이익은 온전히 증권투자자의 몫이 되며 경제계는 맑고 투명해져 이 분야에서 만큼은 세계적인 모범국가가 될 것이다. 추석 연휴 잘 지내고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렇다. 말을 해놓고 보니 확실히 비 맞은 중이 중얼거리는 소리와 비슷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약간의 조건만 충족된다면 이번 상법개정안이 전혀 이상할 것도 거부감을 가질 일도 없다. 그 약간의 조건은 이렇다. 상법을 고치는 대신 공정거래법의 대기업 관련 조항을 폐기하고 증권거래법의 유사 조항을 삭제하며 금산법 24조 같은 반(反)기업 법제들을 정비하자. 논란이 되고 있는 '회사기회 유용금지'만 해도 그렇다. 공정거래법이 대기업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고 온갖 규제를 나열하고 있는 것은 바로 회사기회의 유용을 막자는 취지가 전부다. 출자규제도 그렇거니와 순환출자를 범죄시하고 세계에 유례 없는 의결권 승수니 괴리도 따위의 괴이한 고등수학 공식을 늘어놓고 있는 것도 대주주의 전횡을 막아 회사의 이익을 대주주가 편취하는 것을 막자는데 다름 아니다.

그런 고등수학보다는 단순 명료하게 상법에 규정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상법개정안이 주장하고 있듯이 모든 것을 법정에서 다투면 그만일 것을 공정위까지 나서서 복잡한 수학공식까지 동원해 가며 예비 검속에 매달릴 이유는 없다. 경영 판단이냐 회사기회 유용이냐를 따지는 것은 재판정에서 다투면 그만이다. 더구나 앞으로는 공판중심주의를 한다지 않는가. 그러니 행정 당국이 경영판단 여부를 사전적으로 재단하도록 돼있는 다른 법률들도 잘 살펴 이들 역시 차제에 폐기하자.

따지고 보면 공정거래법의 대부분이 예비 검속이다. 식민지 시대,그리고 유신독재 때 잠시 긴급조치라는 이름의 정치 활동 예비검속이 있었지만 기업활동에 대한 상시 예비검속이라니 될 말인가. 한 가지 사안을 이법 저법에서 돌아가면서 벌 주겠다고 달려드는 것도 기이하고 더욱이 비슷한 법률 내용을 여기저기 규정하느라 인쇄비에 종이값 만도 이중삼중으로 들지 않겠는가.

또 이번 개정안의 집행임원제를 환영하는 대신 그동안에도 허울에 그쳤던 사외이사 조항은 차제에 폐기하자. 회사 수위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등기 이사라니! 명망가 사외이사들에 대한 반성이 집행임원제 도입의 배경이라면 실질과 명분을 일치시키는 것이 맞다. 질서정연해야 비로소 법이라고 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미국 은행법을 베껴와 엉뚱하게도 보험사와 카드사를 규제하고 있는 금산법 24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처음부터 무지이거나 법적 사기(詐欺)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금산법 24조였다. 경제법의 기본인 상법을 바꾸자면 하위 법률들도 질서정연하게 바꿔주는 것이 맞다. 그렇게 한다면 별 쓸모도 없는 일에 매달려 고생하시는 공무원들을 집에서 편히 쉬게 할 수도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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