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이젠 우월감을 경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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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星來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100년도 아닌 98년 전,서울에서 나오는 신문인 경성신보 사설에 이런 말이 있다. "한국 유학생은 전연 실패하여 전도(前途)에 일점의 광명조차 볼 수가 없다. … 한국인은 아직 전혀 근세적 교육을 받을 만큼 발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두뇌는 일본의 가마쿠라(鎌倉)시대 정도에 머물러 있다."
요컨대 조선이란 나라는 발전단계가 일본보다 거의 1000년 뒤져 있어 조선 청소년은 근세적 교육을 받을 만큼 깨어있지 않다는 말이다. 1876년 개국 이래 적지 않은 청소년이 일본에 유학했다. 1907년 당시 약 600명에 달했다는 통계도 있다. 그런데 이들 유학생은 공부할 가치(價値)가 없으니 포기하라는 말이다.
그보다 조금 앞서부터 일본인들은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인 논평을 내놓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는 당대 최고의 일본 경제학자 후쿠다 도쿠조(1874∼1930)가 있다. 그는 1903∼1904년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에서 조선경제의 정체성론(停滯性論)을 발표하면서 조선의 경제 발전상태가 일본보다 1000년가량 뒤져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게 참혹한 평가를 받았던 한국이 그 후 1세기 만에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2위의 대국 반열에 올랐다. 세계 최대라는 미국의 16분의 1이며, 2위인 일본에 비해선 6분의 1 수준이라지만 이만하면 얼마나 놀라운 성공인가?
앞의 논평을 한 '경성신보'는 일본인들이 1907년 11월 창간한 일본어 신문이다. 7월의 제2차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함께 고종은 강제 퇴위되고,모든 분야에 일본인 고문관이 등장하여 조선왕조의 정치 행정을 일본인이 장악한 때였다. 그런 가운데 망국은 가속화하여 1910년에는 정식으로 일본 식민지가 되고,그 속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은 낳고 자랐다. 그렇게 낳고 자란 조선 청소년들이 비관적인 역사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래서 1944년의 이광수(1892∼1950)는 "아시아 10억은 영미의 식민지 토인이라는 운명 아래서 신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10억은 점점 선조의 문화도 정신도 잃고 미·영인의 변소를 소제하고,찌꺼기를 얻어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격렬한 자기비하를 보여준다.
이렇게 춘원 이광수가 서양에 대한 철저한 열등감에 빠진 것은 이미 일본의 지식인들이 명치유신(1868) 초기에 가졌던 생각과 그리 멀지 않고,또 1900년 처음으로 미국을 구경하면서 중국의 양계초(梁啓超·1873~1929)가 느꼈던 열등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898년 무술정변으로 실각한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어를 익히면서 서양 사상을 일본어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 독서를 통해 그가 얻은 것은 광명 그것이었다. 그는 이를 두고 "어두운 방에서 해를 보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서로 다른 시기에,서로 달리 표현되기는 하지만,한·중·일의 대표적 지식인층은 이렇게 서양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고 근대화 과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열등감쯤은 말끔하게 씻어버린 듯하다. 놀랍게도 제일 늦게 서양을 알고,열등의식도 늦게 갖게 되었던 한국인들이 오히려 먼저 그 질곡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반도체의 거듭되는 세계 최초 소식을 접하면서 덜컥 걱정이 된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온갖 몰상식(沒常識)을 진열하는 21세기 한국인들은 이광수의 열등감을 넘어선 우월감에서 그런 행태를 보일 것이다.
벼락출세한 사람들에게 하늘은 동전만 하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도 있지만,참으로 겁 없이 망자존대(妄自尊大)하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미국에 대해 지나치게 자주와 주체를 외치는 풍조 역시 그런 모습의 한 자락인 듯하고….
100년도 아닌 98년 전,서울에서 나오는 신문인 경성신보 사설에 이런 말이 있다. "한국 유학생은 전연 실패하여 전도(前途)에 일점의 광명조차 볼 수가 없다. … 한국인은 아직 전혀 근세적 교육을 받을 만큼 발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두뇌는 일본의 가마쿠라(鎌倉)시대 정도에 머물러 있다."
요컨대 조선이란 나라는 발전단계가 일본보다 거의 1000년 뒤져 있어 조선 청소년은 근세적 교육을 받을 만큼 깨어있지 않다는 말이다. 1876년 개국 이래 적지 않은 청소년이 일본에 유학했다. 1907년 당시 약 600명에 달했다는 통계도 있다. 그런데 이들 유학생은 공부할 가치(價値)가 없으니 포기하라는 말이다.
그보다 조금 앞서부터 일본인들은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인 논평을 내놓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는 당대 최고의 일본 경제학자 후쿠다 도쿠조(1874∼1930)가 있다. 그는 1903∼1904년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에서 조선경제의 정체성론(停滯性論)을 발표하면서 조선의 경제 발전상태가 일본보다 1000년가량 뒤져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게 참혹한 평가를 받았던 한국이 그 후 1세기 만에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2위의 대국 반열에 올랐다. 세계 최대라는 미국의 16분의 1이며, 2위인 일본에 비해선 6분의 1 수준이라지만 이만하면 얼마나 놀라운 성공인가?
앞의 논평을 한 '경성신보'는 일본인들이 1907년 11월 창간한 일본어 신문이다. 7월의 제2차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함께 고종은 강제 퇴위되고,모든 분야에 일본인 고문관이 등장하여 조선왕조의 정치 행정을 일본인이 장악한 때였다. 그런 가운데 망국은 가속화하여 1910년에는 정식으로 일본 식민지가 되고,그 속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은 낳고 자랐다. 그렇게 낳고 자란 조선 청소년들이 비관적인 역사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래서 1944년의 이광수(1892∼1950)는 "아시아 10억은 영미의 식민지 토인이라는 운명 아래서 신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10억은 점점 선조의 문화도 정신도 잃고 미·영인의 변소를 소제하고,찌꺼기를 얻어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격렬한 자기비하를 보여준다.
이렇게 춘원 이광수가 서양에 대한 철저한 열등감에 빠진 것은 이미 일본의 지식인들이 명치유신(1868) 초기에 가졌던 생각과 그리 멀지 않고,또 1900년 처음으로 미국을 구경하면서 중국의 양계초(梁啓超·1873~1929)가 느꼈던 열등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898년 무술정변으로 실각한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어를 익히면서 서양 사상을 일본어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 독서를 통해 그가 얻은 것은 광명 그것이었다. 그는 이를 두고 "어두운 방에서 해를 보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서로 다른 시기에,서로 달리 표현되기는 하지만,한·중·일의 대표적 지식인층은 이렇게 서양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고 근대화 과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열등감쯤은 말끔하게 씻어버린 듯하다. 놀랍게도 제일 늦게 서양을 알고,열등의식도 늦게 갖게 되었던 한국인들이 오히려 먼저 그 질곡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반도체의 거듭되는 세계 최초 소식을 접하면서 덜컥 걱정이 된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온갖 몰상식(沒常識)을 진열하는 21세기 한국인들은 이광수의 열등감을 넘어선 우월감에서 그런 행태를 보일 것이다.
벼락출세한 사람들에게 하늘은 동전만 하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도 있지만,참으로 겁 없이 망자존대(妄自尊大)하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미국에 대해 지나치게 자주와 주체를 외치는 풍조 역시 그런 모습의 한 자락인 듯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