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산 < 소설가 >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과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영 다르다.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신춘문예 같은 제도를 통해 이른바 등단(登壇)이란 걸 하고 나면 그 뒤가 막막해진다.

최종 목표가 시인이었으므로 시인이 되어 꿈을 이루고 나면 그만 더 할 일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면허증을 따면 그때부터 시작인데,면허증이 꿈이었으니 따고 나면 장롱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이치(理致)와 같다고나 할까.

그에 반해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남이 알아주든 말든 평생 꾸준히 시를 쓴다.

스스로 만족하는 '좋은 시'란 본래가 없는 것이므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혼자 시작(詩作)을 계속한다.

그래서 결국 명작을 남기고 훌륭한 시인이 되는 것이다.

두 경우가 처음에는 차이가 없어도 결과는 판이해진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상대도 없는데 그저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소개를 받아서 적당히 마음에 드는 짝을 구해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그 다음은 없다.

오랜 꿈인 결혼을 했으니 뒷일은 별 계획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갈 뿐이다.

정말 사랑하는 상대가 있는 커플은 이와는 다르다.

그들에겐 결혼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고,설령 지금 당장 결혼을 하지 못하더라도 계획이 있고 장래가 있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해질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결혼이란 제도는 사랑의 한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명색(名色) 가운데 명(名)을 좇느냐,색(色)을 좇느냐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 도달점은 완연히 달라진다.

명은 이름이고 형식이며 색은 본질이다.

본질을 추구해서 이름과 형식을 얻어야지,이름과 형식을 좇아서 본질에 이르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일이 어렵다.

색이 없는 명을 우리는 흔히 허울이라고 부른다.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 훌륭한 시인이지 훌륭한 시인이라고 다 좋은 시를 쓰는 건 아니다.

지금 어디에선가는 굳이 신춘문예 같은 걸 통과하지 않고도,시인 소설가라는 타이틀이 없이도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쓰는 이들이 허다할 테고,장담컨대 그들은 언젠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해서 세상을 감동시키고 문명(文名)을 드날릴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전교 1등을 하지 않아도,비록 서울대학교를 못 가도 공부를 할 아이는 끝까지 할 테고,지금 아무리 1등을 하고 명문대학을 수석으로 들어가도 본질을 망각하고 허울을 좇는다면 뒤가 초라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는 서로 사랑해서 죽고 못사는 사람들이 하는 게 결혼이고 행복은 그런 결혼을 따라가는 것이지,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했다고 행복이 절로 보장되지 않는 이치와 같다.

가만히 살펴보면 세상사가 전부 그렇다.

남이 알아주든 말든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하고 있는 사람을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대통령,시장,도지사,군수로 뽑아야지 갑자기 나타나서 소리 지르고 다니는 사람을 뽑으면 만사가 어지러워진다.

옛날부터 오로지 대통령이 꿈이었던 사람,대통령 시켜달라고 선동하고 조직 만드는 사람,대통령 하겠다고 총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사람들로만 우리 현대사가 흘러왔으니 돌아볼수록 실로 유감천만이다.

그런 이들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 혼란과 시행착오만 거듭하는 건 일견 당연지사다.

드러나지 않는 분야,사소하고 작은 일이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일하고 있는 사람,정작 감투엔 별 관심이 없어도 비전이 있고 계획이 있는 인물을 가려내어 중책을 맡기는 게 국민의 몫이다.

당선과 취임이 시작이 되어야지 그게 끝이어선 곤란하지 않는가?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