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孝鍾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최근 두 달 사이에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민의의 심판은 참여정부에 대해 불신임이라고 할 만큼 매서운 것이었다.

'회초리'로 때렸다기 보다는 '돌'로 때린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에서는 투표를 '종이돌(paper stone)'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투표용지는 분명 평범한 종이임에 틀림없지만,그 실질적 내용은 돌과 다름없다.

돌은 맞으면 아픈 정도가 아니라 심한 부상을 입는다.

7·26 재보선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5·31지방선거보다 더 어마어마한 돌을 던진 셈이다.

탄핵의 주역을 부활(復活)시킴으로써 참여정부가 탄핵받을 만했다는 사실을 새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정말로 딱한 것은 참여정부의 태도다.

국정운영에 대해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를 연거푸 받았으면 대오각성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데,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역사의 책무를 새삼 생각한다거나 혹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반응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생뚱맞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물론 국정을 주도하는 최고책임자로서 소신도 있어야 하고 역사의식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다.

다수의 국민들이 국정 패러다임의 변화를 절실하게 갈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그 변화를 외면하면서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호도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증류수'와 같은 정치가 되어 '격화소양(隔靴搔 )', 즉 "장화 위로 가려운 데를 긁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참여정부에는 역사의식이나 투철한 소신보다는 거울이 필요하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말이다.

우리가 거울을 본다는 것은 거울에 비친 우리자신을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막상 정부가 여론에 귀를 기울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을 보노라면,거울은 보지 않고 창을 보는 것 같다.

창을 통해서는 자신을 보기보다 창밖의 것들을 본다.

사실 우리는 거울인 것 같은데도 창의 경우처럼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거울을 알고 있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가 그것이다.

백설공주의 계모 왕비는 매일 아침 마법(魔法)의 거울앞에 가서 외친다.

"저 멀고도 먼 공간으로부터 온 마법의 거울속 노예여,바람과 어둠을 가로질러 내 너를 부르노라." 그러면 거울의 노예가 나타나 왕비의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한다.

자기자신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다른 세계를 알고 싶어하는 왕비가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가"를 물으면 거울의 노예는 "왕비"라고 대답한다.

결국 이 거울은 말만 거울이다.

그 곳에 비치는 것은 왕비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부터 와서 거울에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참여정부도 종종 거울을 보고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진지하게 알고 싶어하기 보다는 거울의 노예에게 "누가 이 세상에서 정부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냐"하고 계속해서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언론"이라는 대답을 듣고 있다.

언론의 비판이나 문제제기에 대해 기분이 좋을 정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흙탕에서 벌거벗고 싸우는 싸움꾼처럼 행동을 하는 것은 정부의 품격(品格)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정부'라고 할 때는 신화와 같은 믿음이 있다.

국리민복의 최후의 보루(堡壘)이고 각종 난제들의 최종 해결자라는 믿음 말이다.

언론의 문제제기를 악의적인 비판이라고만 치부하지 말고 참여정부가 좋아하는 방식인 '역발상'을 할 수는 없을까.

금을 제련할 때는 불이 사용된다.

불이 금에 대해 작용하는 것은 금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순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여정부가 언론비판을 통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순화'된다는 생각을 할 수만 있다면, '멋진 역발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