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王敦 < 진매트릭스 대표 wangdon@genematrix.net >

1970년대 경제 성장의 주역(主役)이던 우리 아버지들은 자식이 언제 컸는지도 모를 만큼 바쁜 직장생활을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자식 얼굴을 볼까말까 할 만큼 일 속에 파묻혔다.

돌이켜 보면 자기 희생을 감내(堪耐)한 고마운 세대였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사정도 비슷하다.

다만 커가는 아이들이 아빠의 얼굴을 볼 새가 없어졌다.

아빠들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가 숨돌릴 사이 없이 바쁘게 사는 때문이다.

근무조건이 개선돼 오히려 아빠들의 여가시간은 많아졌으나,아이들의 귀가 시간은 학원이다 과외다 해서 점점 늦어지고 있다.

졸음을 참으며 지쳐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리기도 하지만,이튿날 출근해야 하는 아빠들은 먼저 잠들기 일쑤다. 고작해야 새벽녘에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이나 보게 된다.

오래 전 교수로 일하는 한 미국인 친구가 상담차 나를 찾아왔다.

자기가 맡고 있는 생물학 시험에서 한국 학생들이 상위 10등을 대부분 차지해 너무 놀라웠다고,그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우리 학생들은 "professional student야.그들은 입시준비로 혹독한 훈련을 받아.금요일 저녁에 파티하고 주말에 쉬는 미국 애들은 따라올 수 없지"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우리 학생들이 성적이 좋다는 말에 우쭐한 마음을 갖기도 했지만 영어도 부족한데 얼마나 노력했으면 상위권에 들었을까 측은(惻隱)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쩌다 늦은 밤 엘리베이터에서 귀가하는 어린 초등학생들을 보면,'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지 알기나 할까 안쓰러운 마음이다.

부모의 가장 큰 자랑은 남에게 칭찬받는 자식이고,자식에게 가장 물려주고 싶은 유산은 삶의 지침이 되는 소중한 말 한마디인데,지금 우리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사라지고 있다.

정권이 바뀔 적마다 새로운 교육정책들이 춤추고,미래의 새싹인 아이들이 부모로부터,사회로부터,그리고 친구로부터 꿈을 키우고 삶의 지혜를 배울 기회는 줄어만 가고 있다.

어렵던 옛 생활 속에도 부러운 것이 있다.

윗대로부터 배운 농사 지식과 자신이 겪은 삶의 지혜를 자식에게 오순도순 가르칠 수 있었다는 것은 부모들의 큰 행복이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지혜와 경험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교과서(敎科書)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는 수능 참고서가 바이블처럼 되었다.

공부에 매달려 씨름하는 아이들을 보면,해주고 싶은 내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자식의 머리나 한번 쓰다듬는 것이 오늘의 우리 아버지들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