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濟民 < 연세대 교수·경제학 >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역동성은 크게 약화됐다.

성장률이 떨어진 것도 그러려니와 장기적으로 성장 잠재력을 결정하는 투자가 부진한 것이 진짜 문제다.

위기로부터의 회복기간인 2000년까지를 제외하고 2001∼2005년간을 본다면 투자 증가율은 3%에 미달한다.

위기 직전 5년간 투자 증가율은 8.5%였다.

그 중에서도 설비투자 부진은 두드러진다.

위기 전 5년간 10.6%씩 증가하던 설비투자가 지난 5년간은 1.2% 증가하는 데 그쳤다.

아직도 무엇보다 성장이 중요한 한국 경제에서 투자가 이렇게 부진하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투자가 왜 부진한가.

잘 알려진 것처럼 규제의 만연,노사관계 불안,맞춤형 인력 부족,산업에 대한 비전 부재,혁신 중소기업을 위한 금융 인프라 미비 등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요인은 위기 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위기 전과 후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업과 금융회사의 행태 변화다. 위기 전 한국의 금융회사는 기업의 신용상태에 대해 엄격한 심사도 하지 않고 관행에 따라 대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위기 이후 그러한 행태가 크게 시정됐다.

이에 따라 많은 기업이 부채(負債)에 의존해 경영하는 게 별로 득이 안 된다고 인식해 부채비율을 대거 낮추게 됐다. 그 과정에서 투자가 부진하기도 했으나 그렇게 해서 재무상태를 개선한 기업은 2003년 이후 어느 정도 투자활동을 회복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반면 재무상태를 개선하지 못한 기업은 위기 후 금융회사의 행태가 바뀜에 따라 돈 구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당연히 경영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최고경영자가 돈 구하러 동분서주(東奔西走)해야 하니 제대로 경영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런 기업이 얼마나 될까.

엄격한 기준은 없지만 한국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내는 '강시( 屍)기업'의 비중이 2001년 전체 기업의 30.2%이다가 2004년 26.4%까지 떨어졌지만 2005년에는 30.8%로 상승했다.

올해 1·4분기에는 작년 동기에 비해 3%포인트 가까이 올라간 것으로 나타난다.

전체 기업의 3분의 1 정도가 그런 기업이니 국민경제 전체로 보아 투자가 활발할 수가 없다.

앞으로 이자율이 올라갈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기다리면 문제가 저절로 개선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투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런 기업을 퇴출시키든지,출자전환 등을 통해 살리든지 하는 새로운 구조조정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도 그런 작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1년 9월 이후로 '상시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기업의 비중이 줄고 있지 않다는 것 자체가 상시구조조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물론 새로운 구조조정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강시기업' 중에는 중국의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는 노동집약적 중소 제조업 기업처럼 사업의 전망 자체가 나쁜 경우도 많다.

이런 기업을 급작스럽게 퇴출(退出)시키면 큰 사회적 부담이 올 것이다.

그러나 사업 전망은 있으면서도 재무상태가 나빠서 '강시기업'이 된 기업도 적지 않아 보인다.

KDI 연구에 따르면 2004년 1년 간 전기전자 등 고기술 제조업에 속하는 대기업 중에도 20.3%가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고 있다.

중소기업은 32.4%가 그렇다.

이런 기업 중에서 특히 전망이 좋은 기업이라도 빨리 가려내 재무구조를 개선해 주는 것이 투자를 살리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물론 규제 철폐,노사관계 개혁,교육 개혁,산업에 대한 비전 제시,중소기업 금융 개혁 등을 통해 투자를 살리는 노력도 계속해야 한다.

이런 노력에 비하면 새로운 구조조정의 효과는 작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은 노력이라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정책의 정도(正道) 아니겠는가.

규제 철폐 같은 조치들이 외환위기 전부터 끊임없이 말만 있으면서 시행은 너무도 어려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