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톨레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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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에는 '관용의 박물관(The Museum of Tolerance)'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와 그의 나치정부가 무려 600만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 넣어 학살한 참상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박물관의 진정한 뜻은 복수보다는 관용으로 아픔을 참자는 것이라고 한다.
원수에 대한 복수를 당연시했던 유대인들의 율법을 뛰어 넘었기에 '관용'이라는 이름을 단 박물관의 존재가 더욱 의미있게 부각되는 것 같다.
증오와 대립,분열이 난무하는 현장에서는 으레 '톨레랑스(관용)'가 강조되곤 한다.
'견디거나 참는다'는 라틴어 'torerare'에서 유래한 톨레랑스는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당시 구교와 신교 사이에는 광적인 전쟁이 벌어졌는데,이 전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톨레랑스가 거론된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얘기다.
야당 대표가 피습당한 뒤,우리 사회의 톨레랑스가 과연 이 정도뿐인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온갖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데도 사회적 합의를 찾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오히려 이해관계인이나 집단간에 독단적인 언사들이 더욱 난무해 갈수록 꼬이는 형국이다.
당장 지자체 선거는 물론이고 벌써부터 내년 대선을 앞두고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걱정들이 쌓여가고 있다.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고 상대를 무시하면 이기적인 사회가 되게 마련이다.
나와 다른 당신을 이방인 취급해서야 사회적 통합은 요원해질 게 뻔하다.
셰익스피어는 남의 잘못에 대해 관용하라고 말한다.
"오늘 저지른 남의 잘못은 바로 어제의 내 잘못이었던 것을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톨레랑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도 같은 개념이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우리의 전통적인 훌륭한 덕목이었다.
실종된 이 덕목을 찾아 상대를 이해하고 받드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우리가 진정 원하는 톨레랑스의 사회가 아닐까.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와 그의 나치정부가 무려 600만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 넣어 학살한 참상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박물관의 진정한 뜻은 복수보다는 관용으로 아픔을 참자는 것이라고 한다.
원수에 대한 복수를 당연시했던 유대인들의 율법을 뛰어 넘었기에 '관용'이라는 이름을 단 박물관의 존재가 더욱 의미있게 부각되는 것 같다.
증오와 대립,분열이 난무하는 현장에서는 으레 '톨레랑스(관용)'가 강조되곤 한다.
'견디거나 참는다'는 라틴어 'torerare'에서 유래한 톨레랑스는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당시 구교와 신교 사이에는 광적인 전쟁이 벌어졌는데,이 전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톨레랑스가 거론된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얘기다.
야당 대표가 피습당한 뒤,우리 사회의 톨레랑스가 과연 이 정도뿐인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온갖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데도 사회적 합의를 찾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오히려 이해관계인이나 집단간에 독단적인 언사들이 더욱 난무해 갈수록 꼬이는 형국이다.
당장 지자체 선거는 물론이고 벌써부터 내년 대선을 앞두고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걱정들이 쌓여가고 있다.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고 상대를 무시하면 이기적인 사회가 되게 마련이다.
나와 다른 당신을 이방인 취급해서야 사회적 통합은 요원해질 게 뻔하다.
셰익스피어는 남의 잘못에 대해 관용하라고 말한다.
"오늘 저지른 남의 잘못은 바로 어제의 내 잘못이었던 것을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톨레랑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도 같은 개념이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우리의 전통적인 훌륭한 덕목이었다.
실종된 이 덕목을 찾아 상대를 이해하고 받드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우리가 진정 원하는 톨레랑스의 사회가 아닐까.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