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량진상권은 외환위기 덕을 톡톡히 봤다.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노량진 고시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상권이 활성화됐다.

노량진역을 가로질러 300m도 안 되는 거리에 노량진수산시장이 있지만 상권 발전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지역 상인들은 입을 모은다. 이 상권은 철저히 공무원과 대입시험 준비생을 주 고객으로 움직인다.

김일식 희소부동산 사장의 말대로 "고시생의 일정과 생리도 모르면서 노량진에서 장사하겠다고 나섰다가는 투자비만 날리기 십상"이다.

1년에 두 번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현상은 고시생을 상대하는 상권의 숙명이다.

권인권 한교고시학원 기획실 과장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2000~3000명 선이던 수강생이 2~3배까지 늘어난다"고 밝혔다.

동작교육청에 허가된 수강생 인원은 재수학원 9개에 1만9200명,고시학원 23개에 1만5259명이지만 성수기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찾는다.

이때가 대목이다.

첫 번째 대목은 4월에 9급 시험이 끝나면서,두 번째 대목은 8월에 7급 시험과 10월에 서울시 9급 시험이 끝나면서 막을 내린다.

정교상 홍문관서점 사장도 "7월과 12월에는 매출이 두 배로 오른다"고 말했다.

노량진은 서울에서 2000원 안팎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서상원 우리공인중개소 사장은 "전국에서 가장 싼 식당이 모여 있는 곳으로 TV에 소개될 정도"라고 말했다.

밥집거리에는 10장짜리 식권을 1만8000원이나 2만원에 판다는 전단이 곳곳에 붙어 있다.

8개월째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김모씨(25)는 이보다 더 싼 값으로 식사를 해결한다.

"식권 50장을 사면 100원,100장을 사면 200원 깎아줘요.

저는 친구들과 함께 대량 구매를 해서 밥값을 줄입니다."

10년 전과 같은 밥값을 받다 보니 상인들은 힘겨워한다.

"요즘은 하루에 500~600명 오는데 적자입니다.

매출은 뻔한데 반찬 8가지를 내면서 아줌마 4명 쓰면 뭐가 남겠습니까.

돼지고기만 하더라도 3년 전 1근에 1200원 하던 것이 지금은 2000원입니다." 4년 전 권리금 1억원 등 2억원 가까이 투자해 사업을 시작한 신동수 통통이네 식당 사장은 방학만 바라보고 있다.

하루에 700~800명 정도 오면 수지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입소문이 빠르다는 것도 노량진상권의 특징이다.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업소는 순식간에 유명세를 타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퇴출된다.

한 밥집 사장은 2~3년 전 뷔페식 저가 밥집 주인들이 가격 담합을 시도했다가 얼마 못 가서 두손 들고 말았다고 털어놨다.

"음식 맛에 비해 값이 조금이라도 높다싶으면 손님 발걸음이 하루아침에 두절되더군요. 결국 가격을 내려야 했지요." 고시생 소비자들의 네트워크파워가 그만큼 무섭다는 얘기다.

소비자들은 3~4개월마다 손님이 바뀌는 상권 특성 때문에 상인들이 불친절하고 단골 예우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이에 대해 한 호프집 주인은 "고시생들에겐 너무 잘해줘도 장사가 안 된다"고 푸념한다. 9급 공무원시험 준비생인 박모씨(29)는 "호프집에서 아는 체하면 공부는 안 하고 노닥거렸다는 말밖에 더 되겠어요.

얼마 전 술집에서 공짜 안주를 주길래 '너무 놀았구나' 싶어 즉시 발걸음을 끊었어요"라고 말했다.

추종식 사이버파크 PC방 사장도 "시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서 그런지 손님들이 내성적이고 까탈스럽다"면서 "객단가가 서울에서 제일 싼 상권인데도 까다롭기는 압구정보다 더 할 것"이라고 말했다. PC방은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에겐 잘 먹히는 장사다. 6개월 전 개점한 추 사장은 하루 70만원의 매출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고 자평했다.

노량진상권도 가난(?)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커피전문점 파스쿠찌는 객단가(고객 1인당 평균 지출액)가 7000원임에도 불구하고 전년 동월 대비 30%의 신장세를 이뤘다는 사실이 '상권 업그레이드'를 웅변하고 있다.

"예전엔 공무원 준비생들은 가난한 시골 출신이 많았지만 요즈음은 강남 출신들도 많아지면서 씀씀이가 예전에 비해 차츰 세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1인분에 3000원 하는 삼겹살집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최근 들어선 5500원짜리 식당도 성업 중이다.

일반직 9급 수험생 진모씨(27)는 "밥값에 민감한 것은 사실이지만 몸보신을 위해 6000원이나 8000원짜리 삼계탕을 먹을 때도 있다"고 말했다.

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