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봄, 삼성전자 AM-LCD사업부 천안공장장 장원기(張元基) 상무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사업부장인 이상완(李相浣) 전무(현 삼성전자 LCD총괄 사장)를 찾아갔다.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원위치해야 합니다. 이러다가 고객들 다 떨어지겠습니다."

묵직한 저음인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높아져 있었다.

LCD 시장을 장악한 일본업체들보다 무려 10년이나 늦게 시장에 뛰어든 삼성전자는 일본기업을 추월할 비장의 무기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바로 '4 마스크(Mask) 공정'이다.

LCD 패널 제조용 유리기판에 전자회로를 씌우는데 필요한 틀인 마스크의 개수를 4개로 줄이는 획기적인 전환을 꿈꾸어 본 것이다.

마스크 수가 많을수록 공정은 복잡해진다.

재료비는 올라가고 공정시간은 늘어난다.

반면 생산효율은 떨어진다.

마스크 수를 축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불과 몇달전 7개에서 5개로 2개나 줄였는데, 이를 4개로 줄이라니 힘에 벅찰 수 밖에 없었다.

천안공장 3라인에 4마스크 공정을 도입하자 제품의 품질이 떨어지고, 수율(收率.예상량과 실제 얻은 양과의 비율)도 턱없이 낮아졌다.

사실상 양산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패널 공급이 원할치 않자 고객사들의 불만도 터져나왔다.

"장 상무, 처음엔 다 그런 거 아니겠어?" 그게 다 였다.

이 전무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삼성전자와 소니가 지난해 4월 합작해 세운 LCD 생산업체인 S-LCD의 최고경영자(CEO)인 장원기(51) 대표이사. 삼성전자에서 부사장으로는 처음으로 'CEO' 타이틀을 거머쥔 그는 25년 직장생활을 돌이킬때면 '4 마스크 사건'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희안하죠? 노력하니 결국 됩디다."

새 공정이 성공적으로 안착하자 곧바로 '대박'이 터졌다.

그 해 처음으로 세계 LCD 시장점유율 1위에 올라서는 기쁨을 전직원이 만끽하게된 것. 95년 2월 첫 LCD 제품 양산을 시작한 지 불과 3년여만에 이룬 쾌거였다.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그리고 성공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목표를 높게 잡아야 성취도가 높다는 사실을 그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삼성, 소니 양사가 지난 1년간 무려 2조1천억원을 투자한 거함 'S-LCD호(號)'의 선장이 된 이후에도 그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S-LCD는 출범 6개월만에 수율 90%와 월 최대생산량 6만장(유리기판 투입기준)을 달성한 데 이어 올초부터 생산 규모를 계속 확대하고 있다.

내년초에는 생산능력이 최대 월 9만장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그런 장 대표가 아이러니하게도 당초 삼성전자에 입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81년 연세대 화학공학과 졸업과 함께 코리아엔지니어링(현 삼성엔지니어링) 입사를 염두에 두고 삼성그룹에 원서를 냈다.

'월급을 가장 많이 주는' 유공(현 SK)에 합격했지만 그에겐 "공대 출신이니까 엔지니어가 돼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전부였다.

삼성그룹 연수를 마치고 1,2,3지망 모두 코리아엔지니어링을 선택했는데, 회사는 그의 희망을 저버렸다.

낙담한 그에겐 삼성전자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물론 우스개 섞인 얘기였겠지만 '삼성전자에서 화학공학과 출신들은 백색가전 도장부서에서 가전제품에 페인트 칠을 한다'는 그가 입수한 첩보는 엔지니어의 꿈에부푼 그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안되겠다 싶더군요.

인사담당자에게 당장 그만 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반도체 한번 해볼래?'라고 묻더군요.

그날부터 반도체에 뼈를 묻게 됐습니다."

이후 반도체 공정기술 분야에서 10년간 잔뼈가 굵은 그는 91년 LCD 기술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LCD와 반도체는 공정이나 기술 측면에서 유사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제2의 직장생활'이 시작된 셈이었다.

장 대표에겐 유난히 신규사업이 많이 배정됐다고 한다.

거대장치산업인 LCD 사업은 2조-3조원의 막대한 비용이 투자되는데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 초기가동부터 정상가동까지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지 못하면 앉은 자리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고 만다.

그런 점에서 신규사업이 큰 부담이 됐을 법도 한데 그는 되려 "많은 기회가 주어진 셈입니다.

게다가 신규사업은 여러 부서에서 전사적으로 지원해주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도 거의 없잖아요?"라고 웃으며 반문했다.

장 대표는 요즘 어깨가 한결 무거워짐을 느낀다.

삼성전자와 소니가 추가로 2조원 가량을 S-LCD에 투자, 내년 상반기내에 50인치대 패널을 주력 생산하는 8세대 라인을 신규 가동키로 했기 때문이다.

그에겐 불과 1년만에 40인치대 LCD 시장을 휘어잡은 것처럼 앞으로 50인치대 시장도 수성하라는 명령과 다름없다.

비록 변화의 속도에 매료돼 LCD 사업에 푹 빠져든 장 대표라지만 점점 세를 불리며 턱밑까지 창끝을 겨눈 국내외 경쟁사들의 도전에 직면한 사람치고는 그의 반응은 태연스럽기까지 했다.

"LCD의 숙명 아니겠습니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내부역량을 키우는 수밖에요."


(서울연합뉴스) 강영두 기자 k027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