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운 < 시인 > 지난 일요일 집앞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초등생 아이와 그 아이의 어머니인 듯한 아주머니가 바로 옆자리에서 샤워기를 틀고 몸에 비누칠을 했다. 아주머니가 아이에게 비누칠을 해주려는 순간,아이의 입에서 급하게 튀어나온 말. "수도를 잠그고 해야지.우리나라 물이 얼마나 부족한데…." 그 소리에 내 귀가 번쩍 열렸다. 그리고 아이를 쳐다보며 "아이고 예뻐라.어느 학교 다니니?" 하고 물었더니 인수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했다. "너희 선생님 참 훌륭하신 분이구나" 했더니 3학년 때부터 그렇게 배웠고,학교에도 '물을 아껴 쓰자'는 표어가 붙어 있다고 했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가. 모처럼 목욕탕에서 흐뭇했던 날이다. 다른 날은 몸에 비누칠을 하는 동안 수도를 잠그지 않아 물이 그냥 흘러가는 것을 종종 보았다. 그것이 아까워 아무말 않고 슬쩍 잠궈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고,나를 한 번 빤히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이런 물을 잘 다스리면 흥하고 함부로 쓰면 물 부족으로 재난을 당할 수 있다. 물은 공기처럼 한시도 없으면 살 수 없을 텐데 순간순간 잊고 살아간다. 물 소비량은 자꾸만 늘어나는데 '물 부족'이든 '물 관리의 위기'이든 간에 치수(治水)를 잘 해야만 될 것 같다. 은나라 요왕은 홍수 때문에 백성들이 불안과 근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자 이를 매우 걱정했다. 요왕은 치수사업이 성공해야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물길을 다스리는 직책을 만들어 적임자에 곤을 임명했다. 치수사업은 9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곤은 물길을 다스리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요왕이 죽고 뒤를 이어 순왕이 즉위했다. 순왕도 물의 중요성을 알고 곤의 아들 우에게 치수사업의 책임을 맡겼다. 우는 13년이란 세월을 절치부심해 물길을 여는 데 성공했다. 곧이어 순왕이 세상을 떠나자 우는 천자가 되었고 하나라를 세웠다. 물을 다스리는 데 아버지 곤은 왜 실패했을까? 문제는 물길을 다스리는 방법의 차이였다. 아버지 곤은 주변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물길을 강압적으로 막는 데 급급해 화를 자초했고,아들 우는 주변의 상황과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물이 제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했다. 물을 제대로 다스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막으면 또 다른 길을 내어 흘러가는 것이 물이다. 어찌 물뿐이랴.인생사 물 흐르듯 해야 한다는 말에도 인위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통제나 강압적인 방법이 순간의 위기를 넘기게는 하겠지만,무엇이든 지나치면 결국 터지고 만다. 법(法)의 한자어를 보면 물수(水)에 갈거(去)자로 이뤄져 있다. 물처럼 흘러가게 하는 것이 법이다. 경제 전문가가 많다고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며,정치가가 많다고 정치가 잘 되는 것이 아니요,법률 조항이 많다고 법이 운영의 묘를 살리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든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자연을 거스르는 일에는 늘 부작용이 따른다. 농업용수를 충당하기 위해 지하수를 마구잡이로 개발하면서 전 지구적인 파멸이 앞당겨지고 있다는 기사를 심각하게 읽었다. 인도에서는 19세기 초반까지 진흙으로 지은 '탕카(tanka)'라는 저수조를 계곡 아래에 만들어 빗물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인도에서는 탕카를 되살리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내 어린 시절엔 비가 오면 큰 고무통을 처마 밑에 놓고 빗물을 받아 머리도 감고,걸레도 빨고,허드렛물로 사용했다. 길을 가다 갈증이 나면 언제나 우물에 두레박만 드리우면 시원한 물을 그냥 마실 수 있었다. 아,그 옛날 그런 환경이 새삼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