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운 < 시인 > 어느날 오음(五音)을 자랑하는 난조(鸞鳥)라는 새가 그물에 걸렸다. 왕은 그 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금으로 새장까지 만들어주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10년이 가도 노래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리를 보면 노래하리라 여기고 거울을 걸어 놓았더니 정말로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난조는 차가운 시체로 변했다. 난조는 붉은 깃에 오채(청·황·홍·백·흑)를 입힌 아름다운 새라고 전해진다. 그런 난조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해 스스로 거울에 부딪쳐 목숨을 끊었다고 여기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자유롭게 날아다녀야 할 난조가 10년 동안 새장에 갇혀 살았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짝이 나타나 너무 반가워 목이 터져라고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자신의 허상을 본 난조는 현실의 허무에 절망을 느끼고 자살한 것이라고.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인간이 인간의 잣대에 맞추어 마음대로 생각하고 함부로 단정하는 나쁜 습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일지라도 결국 인간은 인간이 가진 것을 넘지 못한다. 새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며 날갯짓할 때 본연의 자유를 구가한다. 본연의 모습,우린 가끔 그 본질을 잊고 산다. 일상에서 문화처럼 가까이 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정작 문화의 본질은 외면한 채 문화를 단순히 편리함의 도구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문화를 편리함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니체는 불만을 토로한다. 문제는 문화의 진정성이 아닌 편리함에 젖어서 인간 스스로 치장한 굴레에 속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나라에서 한류가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에 부는 한류바람.그 나라가 가진 고유의 문화 속에 우리 문화가 똬리를 튼다는 것은 대단히 경사스런 일이다. 그러나 반가움에 앞서 이런 현상이 노래나 드라마에 편중돼 있을 뿐 문화의 스펙트럼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소수라도 우리 것이 대접받는 풍토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드라마나 노래를 넘어 다양성을 가질 때 우리문화는 날개를 달수 있다. 예컨대 문학이 있고,불교미술이 있고,고유음악이 있으며,추사의 글이나 오천년 한국미술이 있다. 이것 말고도 우리 삶에 담긴 토속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속이 있고 남사당패가 있고 굿거리가 있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나 역사를 우리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창고 안에서 낮잠을 자게 하고 있다. 우리 것이 빈약해서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 신드롬에 가려져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봄눈이 내리던 삼월 하루 '문화인류학의 명저 50'을 읽다가 너무나 놀랐다. '명저 50'에는 일본학자의 저서가 자그마치 여섯 권이나 포함돼 있었다. 인류사를 수놓는 고전의 반열에 6인의 저서가 자리를 같이한다. 더구나 문화는 서구라는 인식의 통념을 깨버린 일본학자들의 노력은 그들이 문화에 쏟는 정성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깨닫게 했다. 한류바람이 불고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우리 문화에 취해 즐거움을 발산하는 건 정말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문화를 단편적인 현상에서 정의 내리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가려진 우리 문화와 역사가 다른 나라의 문화 속에서 빛을 발하고 박수갈채를 받는다면 그게 바로 문화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것이 된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건 새로움에 대한 눈뜸인데,갇혀 있는 문화는 우리를 눈멀게 한다. 에드워드 홀은 "문화는 인간에게 부과된 것일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문화 그 자체가 인간이며 삶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복잡다양한 문화에서 수백만 가지 가능한 결합을 이끌어 낸 결과"라고 말한다. 이젠 열린 공간으로 다양한 우리 문화에 날개옷을 달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