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성 < 휴잇 어소시엇츠 컨설턴트·이사 > 최근 들어 국내 거대기업이 외국자본으로부터 M&A라 불리는 적대적 기업인수ㆍ합병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접하게 된다. KT&G는 국제적 기업사냥꾼으로 불리는 칼 아이칸 측으로부터 M&A 위협을 받고 있으며,우리은행 역시 민영화 방법론과 외국 자본에의 매각 여부를 놓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M&A를 통해 기업 체질과 지배구조가 개선될 가능성이 큰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대기업을 인수할 만한 거대 자본이 국내에 없고,황금주 행사 등 경영권 방어수단이 마땅치 않아 외국인 지분이 많은 대부분의 국내 대기업 또는 금융기관들이 외국자본으로부터의 M&A에만 지나치게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막는 정부의 금융·산업분리원칙(금산분리)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금산분리 원칙을 허물면 금융이 산업자본의 사금고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국제금융시장에서 이기기 위해 국내 산업자본을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12월 도입된 퇴직연금제도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각도의 해법을 제시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퇴직연금제도의 도입으로 예상되는 연금기금의 적립액은 400조원에 이른다. 기존의 퇴직보험과는 달리 이러한 기금의 상당액은 주식 또는 채권시장으로 유입될 것이다. 현재 한국 주식시장의 시가 총액이 약 700조원,채권상장 잔액이 약 700조원인 점을 감안하면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기금들은 우량한 회사를 찾아 장기간에 걸쳐 투자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국내에 자본이 없어 외국계 자본에 헐값으로 기업을 매각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외환은행 인수경쟁에 뛰어든 국민은행과 하나금융지주가 부족한 자체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국내 연금기금인 국민연금기금 등을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금기금은 기업이 직접 주체가 되는 M&A와는 달리 연금가입자들의 자산운용수익 극대화를 추구하므로,장기간에 걸쳐 계획적인 투자와 회수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단기간의 기업가치 향상을 추구하기 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이사회 또는 CEO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필요한 점들을 개선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합병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급진적이고 일방적으로 시행되는 많은 M&A의 경우,피합병 기업이 갖고 있는 무형의 자산을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의 마거릿 블레어의 연구에 의하면 1982년 미국기업들의 무형자산가치는 전체가치의 38% 정도였지만,1991년에는 62%에 이른다고 한다. 한편 연금기금의 투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기업 또는 금융회사는 향후 우리 경제의 지도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법률상 제약을 받겠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투자 대상기업에 어떤 식으로든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공무원연금기금인 CalPERS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살펴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CalPERS는 현재 100조원의 연금자산을 운영하며 투자대상 기업의 경영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작년 12월부터 퇴직연금제도가 시행되었지만 많은 기업들은 아직 비용 차원에서 새로운 제도로의 이전에 따른 득과 실을 따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의 성숙 여부가 미래의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보다 다각도로 이 제도가 주는 득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정부 역시 충분한 세제 혜택을 통해 이 제도의 정착을 도와야 할 것이며,연금기금의 지배구조를 정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