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어느 순간인들/ 꽃이 아닌 적이 있으랴.// 어리석도다/ 내 눈이여./ 삶의 굽이굽이, 오지게/ 흐드러진 꽃들을// 단 한번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니."('꽃이 필 때' 전문) 소설가이자 시인인 송기원 씨가 15년만에 신작 시집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랜덤하우스중앙)을 펴냈다. 그것도 시편마다 중견화가 이인 씨가 그린 환상적인 꽃그림들이 곁들여진 아름다운 '시화집'으로.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꽃이름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언급되는 꽃의 종류만 40개 가까이에 이른다. 그렇지만 '꽃'에 대한 노래는 아니다. 시인은 꽃을 통해 꽃처럼 피어났다 꽃처럼 스러져 간 자신의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 "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 어질머리 흔들리는 봄날 저녁이면/ 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그런 지경에서/ 꿈결같이 사람냄새를 맡곤 하였습니다. /(중략)/ 그대 대신에 느닷없는 수천수만 찔레꽃 송이들/ 무언(無言), 무언으로 피어올랐습니다. "('찔레꽃' 중)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일까. 하얀 '바람꽃'을 바라보아도, 울긋불긋한 진달래꽃 속에도 그대 그리움에 대한 사무치는 정은 한이 없다. 그리움의 정체는 바로 소진해버리지 못한 '격정'과 '정열'이다. "이를테면 내가 죽고/ 아직 앳된 네가/ 소복을 입었다 치자.// 소복의 푸른 넋마저 요염(妖艶)에 물드는 봄밤."('목련' 전문) "갓난애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 사립문을 뛰쳐나온 갓 스물 새댁,/ 아직도 뚝뚝 젖이 돋는 젖무덤을 말기에 넣을 새도 없이/ 뒤란 복사꽃 그늘로 스며드네./ 차마 첫정을 못 잊어 시집까지 찾아온/ 떠꺼머리 휘파람이 이제야 그치네."('복사꽃' 전문) 시는 또한 난폭하고 처절하다. 한 맺힌 사랑을 풀지 못한 남자와 여자의 절망감과 분노는 짐승의 울부짖는 메아리가 되기도 하고, 시뻘건 핏물에 물든 해당화가 돼 천지를 물들이기도 한다. "그럴 줄 알았다// 단 한번의 간통으로/ 하르르, 황홀하게/ 무너져내릴 줄 알았다. // 나도 없이 화냥년!"('모란' 전문) "목소리에도 칼이 달려, 부르는 유행가마다/ 피를 뿜어대던 어린 작부,/ 붉게 어지러운 육신을 끝내 삭이지 못하고/ 백사장 가득한 해당화 터쳐나듯/ 밤바다에 그만 목숨을 던진 어린 작부.('해당화' 전문) "한 사내가 한 여자의 안으로 깊이 들어왔습니다. // 풀지 못한 무슨 매듭이 그리 많은 걸까요. // 온밤을 벌겋게 밝힌 끝에, 한 사내는 으헝, 으헝, 들짐승 같은 울음을 울었습니다. "('밤꽃' 중) 폭풍같은 격정을 몰아낸 시인은, 그리곤 이내 인생의 도를 터득한 차분한 고승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왜 나는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몰랐을까. /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죽음이라고만 여겼을까. // 깊어진 한겨울 연사흘 눈이 내려/ 쑥부쟁이, 엉겅퀴, 개망초, 강아지풀 시든 덤불까지/ 쌓인 눈 속에 온전히 모습을 감추었을 때.//(중략)// 비로소 안으로 열린 길을 더듬어 들며, 나 또한/ 쌓인 눈 속에 온전히 모습을 감추네.('눈꽃1' 중) 불꽃처럼 타오르는 정념의 꽃, 영원을 기다려야 하는 그리움의 꽃, 모든 것이 타고난 뒤에 남은 고독의 꽃, 얼음처럼 고요한 깨달음의 꽃…. 그것은 또한 짧았던 봄날의 환희와 폭풍처럼 몰아쳤던 여름날의 격정과 꽃잎 떨어지는 가을날의 쓸쓸함과, 모든 것이 숨어버린 겨울의 순백을 의미한다. 바로 우리네 인생의 사계절을. 이번 시집으로 "소원을 풀었다"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시인. 그는 "(이번 시집에) 성적 욕망, 연애 내용들이 많은데 그것은 자의식이 자유롭게 됐고 퇴폐, 탐미 안에 바로 나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꽃을 소재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내 안의 꽃을 보지 못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바로 꽃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젊을 때는 내가 퇴폐적이고 탐미적인 문학을 해왔던 점을 숨기려한 적이 있다"면서 "이제 생각해보니 오히려 탐미적이고 퇴폐적인 것이 바로 내 문학의 힘이었다"고 털어놨다. 19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경외성서'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송씨는 소설집 '월행'(1979년), '다시 월문리에서'(1984년), '인도로 간 예수'(1995년)와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1994년), '여자에 관한 명상'(1996년) 등을 펴냈다. 한편 시집과 이인 화백의 그림들은 교보문고와 '문학사랑' 주최로 16-26일 교보문고 강남매장을 시작으로 전국 순회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132쪽. 8천500원.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js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