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만고 끝에 숙적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중국대륙을 통일한 한(漢)고조 유방(劉邦)은 전쟁이 끝나자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신하들의 논공행상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 때문이었다. 전장을 누빈 수많은 장군들은 저마다 전공을 내세우며 자신이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이 적은 사람을 더 우대한다면 그로 인해 불만이 쌓이면서 애써 구축한 나라의 기틀이 다시 흔들릴 수도 있는 까닭에 1년간이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숙고를 거듭하던 유방은 빛나는 전공을 올린 내로라하는 장군들을 제치고 내정을 다스리며 후방 보급을 담당한 승상 소하(蕭何)에게 최고의 상을 내렸다. "우리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소하가 정치를 잘못해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든가 군량 보급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겼다면 장군들이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 있었겠는가"라는 유방의 말에는 적군의 무릎을 꿇린 장군들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눈에 띄는 전공이나 업적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뒤에서 조용히 나라를 안정시키며 국정을 순탄히 돌아가게 하는 게 얼마나 긴요한지 유방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느닷없이 유방의 논공행상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요즘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눈에 띄는 성과나 결과에만 집착하고 또 그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풍조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뛰어난 성과는 당연히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그런 성과가 있기까지의 과정이나 배경 또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이다. 가시적 성과를 올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나라를 안정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것만큼 난감한 일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성과 제일주의가 넘쳐나고 있다. 사학법만 해도 내용의 잘잘못을 떠나, 법 통과로 인해 극심한 대립과 혼란이 빚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여유를 갖고 반대의견을 수렴하며 여론의 검증을 좀더 거쳤더라면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고 예산안 처리마저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연내엔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증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셈이다. 행정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행정도시 건설이 위헌은 아니라지만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국정의 효율성 저하 등에 대한 우려는 도외시한 채 선거공약 실천만 의식해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보니 아직도 반대 세력이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사건 역시 크게 다를 게 없다. 하루빨리 뛰어난 성과를 내놓아야만 더 인정을 받고 더 많은 지원금을 얻을 수 있다는 압박감이 결국은 논문조작으로까지 이어진 데 다름아닐 것이다. 지나치게 성과에만 매달려 좌우 살피지도 않고 달리다 보면 중간중간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다. 대립과 혼란과 충격으로 점철된 올 한 해를 보내며 새삼 유방과 소하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바로 이런 우리의 자화상이 투영된 까닭일 것이다. 새해엔 소하처럼 조용히 내실과 안정을 다지는 분위기가 강해지고,또 유방처럼 그런 것의 중요성을 알아주는 사회 풍토가 자리잡아 갔으면 싶다. 이봉구 논설위원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