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을 앞두고 현금영수증 사용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올해부터는 5000원 이상의 물품을 신용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구매할 경우에도 영수증을 발급받아 그것을 가지고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영업자들의 소득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해 과세 기반을 확충하고 조세 정의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정책 취지의 일환이다. 지하 경제 규모를 축소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하 경제(underground economy)'란 경제활동 가운데 국내총생산(GDP),실업률,조세 같은 공식적인 경제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을 일컫는 말이다. 회계장부를 꾸며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마약을 몰래 사고 파는 등의 불법을 저지르는 일뿐만 아니라 가사노동과 같이 합법적이지만 비공식적인 경제활동도 모두 지하 경제의 범주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지하 경제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될까? 예를 들어 동네 호프집에서 매출을 적게 신고해 소득세를 덜 내는 정도라면 별로 크지 않은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1970∼198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채시장의 '큰 손'으로 회자되던 인물이나,뉴스 첫머리를 장식하는 거액의 비자금을 떠올리면 상당히 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지하 경제는 은닉된 경제활동이기 때문에 그 실체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 계산한 간접적인 추정치도 제 각각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해 볼 때 우리나라 지하 경제 규모는 GDP의 10~30%,금액으로는 150조원 내외의 규모로 파악된다. 소득 수준이 낮고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저개발국들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다른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들보다는 훨씬 높은 편이다. 투기나 탈세,부정부패가 아직 상당하다는 의미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높은 자영업자 비율도 큰 요인이다. 2000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고용에서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35%로 OECD 국가들 가운데 터키와 멕시코 다음으로 높다.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올해 9월까지의 도시가구 가계수지 동향을 보면 비슷한 소비 수준을 누리고 있는 임금근로자와 자영업자 사이에 소비 대비 납세액의 비율은 두 배 넘게 차이가 난다. 임금근로자와 대비한 조세의 형평성도 중요한 사회갈등 요인으로 부상할 조짐이다. 지하 경제의 규모는 바로 그 나라 경제와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건강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도표(왼쪽)에서 보듯이 국가별 소득 수준과 지하 경제 규모는 강한 음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즉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는 대체로 지하 경제의 규모가 작고 그만큼 경제나 사회가 투명함을 의미한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금융시장이 발달하고 또 정부는 세수 기반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게 마련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종전에는 지하 경제의 영역에 속해 있던 부분이 공식경제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온다. 한편 우리나라의 지하 경제 규모는 19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작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1993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금융실명제나 1998년 이후의 신용카드 사용 장려,30대 기업집단에 대한 결합재무제표 작성 의무화,부당내부거래 금지 등의 개혁정책들은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한 수준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하 경제를 척결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와 대응도 주목할 만하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재정건전성이 급속도로 악화하자 세원 확보를 위한 노력과 탈세에 대한 감찰활동도 대폭 강해지고 있다. 올해 9월에 있었던 외국계 사모펀드들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 및 2000억원대의 세금 추징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나라의 지하 경제 규모가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선 조세 부담 증가가 문제다. 세금을 회피하려는 유인은 지하 경제가 생겨나는 주된 요인이다. 1999년 이후 국민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부담하는 세금이 매년 10% 넘게 증가하고 있다. 현재 5%에 못 미치는 경제성장률과 3% 내외의 물가상승률을 합친 것보다 높은 수준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세 부담이 과도하게 늘어난다고 생각할 소지가 있다. 외환위기 이후 큰 폭으로 줄어들었던 행정규제 건수가 다시 꾸준히 증가하는 점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부 규제의 증가 또한 지하 경제를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지하 경제를 바로 잡는 데에는 채찍만으로는 부족하다. 엄정한 세정 집행 못지 않게 공동체 질서의 기본원리나 조세 형평성에 대한 구성원들의 공감도 중요하다. 정부로서는 중장기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세심한 기획 및 실행 능력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정부가 신용카드 사용을 장려하면서 거래 과정을 투명하게 만들고 세수 기반을 확대함으로써 지하 경제의 규모를 줄이기도 했지만,나중에는 그것이 도가 지나쳐 카드사의 부실로 인한 신용경색을 초래했고 그 결과 지하 경제와 연결된 사채금융이 다시금 기승을 부렸던 경험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배민근 연구원 hybae@lge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