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팔자가 가장 센 민족을 꼽으라면 유대인이 단연 수위에 들 것이다.


고향 땅이 바빌론 알렉산더 로마 아랍의 지배를 받는 수천년간 그들에게 동화되기를 거부해 세계 도처로 떠돌아야 했다.


세계 대전 때는 600만여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절대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선민 사상과 역사에 바탕을 둔 피해 의식의 어색한 조합은 그들을 세계 어디에서나 튀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가 발흥할 때면 어김없이 '모난 돌'처럼 정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서울 이태원 관저에서 주한 이스라엘 대사 부인 미할 카스피 여사를 만났을 때,역사의 그늘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개구쟁이같이 짧게 깎은 머리나 도넛 반죽을 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도넛을 물고 도망 가는 애완견 스쿠비의 뒤를 쫓는 모습들은 한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정문을 통과하면서 주민등록번호 검색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고국이 중동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돼 여전히 준 전쟁 상태에 있다는 현실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카스피 여사가 만들어 준 음식은 유대 명절 '하누카'에 먹는 도넛 '수프가니아'다.


하누카는 유대인들이 기원전 165년 마카비 독립 전쟁을 통해 헬레니즘을 따르는 '이방인'들이 '더럽혀 놓은' 성전(聖殿)을 탈환해 다시 야훼께 봉헌한 날이다.


유대력 키스레브월의 25일로 양력으로 치면 대략 크리스마스와 겹친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에 그의 탄생일이 명기돼 있지도 않고 양 치는 목자가 밤새 들판을 거닐 날씨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크리스마스에도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카스피 여사는 "수프가니아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각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모여 만든 나라인 만큼 국가를 대표할 만한 음식이 따로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대인들은 촛불을 밝히고 도넛을 먹으며 매년 이맘 때면 8일간 하누카를 기념해 왔다"고 말했다.


수프가니아는 안에 잼이나 초콜릿 따위를 넣은 지극히 평범한 도넛이다.


그 꾸밈 없는 맛에서 오랜 이민 생활에서도 전통을 고수하려 했던 유대인들의 치열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안네 프랑크도 하누카를 지켰다.


'안네의 일기'에 보면 2년간 암스테르담 안전 가옥에 숨어 살았던 그의 가족들이 하누카를 맞아 노래 부르며 선물을 나누다가 도둑에게 들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 조촐한 파티가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다.


하누카는 '수전절',즉 '성전을 고친 날'이라는 이름으로 요한복음 10장 22절에도 등장한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하며 예수가 성전 안 솔로몬 행각(行閣)을 거닐다가 동네 주민들에게 발각돼 정체를 추궁당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700여만명이 전부인 이스라엘 인구 중 약 100만명 정도는 비늘이 없는 생선을 먹지 말라거나 고기와 우유를 섞지 말라거나 술은 금요일에만 마시라는 등의 성경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유대교적 식습관을 '적법함'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알파벳으로 음차해 '코셔(Kosher)'로 통칭한다. 코셔는 곧 유대인 음식으로 생각하면 된다.


코셔를 따르는 것은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고 한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자신과의 싸움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이 남들과 타협할 줄 모른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그들이 자신과의 싸움에서조차 타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지영 기자 www.hankyung.com/community/kedc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