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형 < 서울대 교수·공법학 > 기술과 산업은 급속히 발전하는데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 하는 현상을 '제도 지체'(institution lag)라 부를 수 있다. 제도 지체는 기술이나 산업의 변화가 기존 법제도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급속하게 일어나는 분야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그 폐해가 결코 만만치 않다. 기존의 고루한 법과 규제가 새로운 창의적 기술이나 비즈니스의 발전을 가로막거나 위법성 시비로 인한 막대한 부담을 발생시키고,경우에 따라서는 현행 법제도의 실효성 저하,무력화 및 권위 상실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도 지체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방송통신 융합 문제이다. 주지하듯이 지금 우리는 기술이나 비즈니스,모든 면에서 디지털 융합(Digital Convergence)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관련 법제도는 방송과 통신의 분리ㆍ규제라는 구태의연한 틀을 고수하고 있다. 그 결과 하루가 다른 기술과 서비스의 발전수준을 따라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한다. 1996년 텔레커뮤니케이션법(Telecommunications Act)을 제정해 '경쟁과 시장개방'이란 원칙 아래 정보통신 환경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온 미국 등 다른 선진국들이 방송통신 융합을 위한 정책적 대응에 나선 지 벌써 10년이 다 돼 가지만,아직까지도 방송과 통신의 영역에 대한 부처간 이견과 혼선으로 정부 입장도 결정하지 못하는 정책의 지체 또는 표류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각광을 받은 DMB,인터넷전화(VoIP),인터넷TV(IPTV) 등 새로운 서비스들이 등장해 기존의 통신망이나 방송망을 통한 네트워크와 콘텐츠의 구분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었는데도,방송위원회나 정보통신부 문화관광부 등 관계부처들은 여전히 방송과 통신 사이 구태의연한 칸막이를 고수하며 족보만 따지고 있고,사업자나 전문가들 또한 방송이나 통신 분야 모두가 악착같이 제 밥그릇 지키느라 혈안이 돼 있다. 국회는 물론 관계부처들이 각기 다른 법안을 내놓으며 각축을 벌이지만,아전인수의 공허한 메아리만 울릴 뿐이다.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IT 강국을 자임하는 나라에서 이처럼 방송통신 융합의 문제 하나를 두고 10년이 다 되도록 해법을 찾지 못하는 현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방송통신 융합에 관한 한 정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 정책 무능력을 바로잡을 방법은 없을까. 정책결정의 결과나 영향이 고도로 불확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디지털 융합에 따른 새로운 서비스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정책의 목표를 두는 것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전통적 규제시스템 때문에 새로운 서비스와 사업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 활성화를 위한 적극적인 유인구조를 조성하는데 목표를 맞춰야 한다. 필요하다면 기존의 규제나 차별을 과감하게 면제 또는 유예함으로써 길을 터주어야 한다. 둘째,디지털 융합에 따른 방송통신 융합에 대한 정책결정과 정부조직개편의 문제를 분리하되,조직 문제는 단기적으로는 현상유지를 전제로 정책대안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고 현명한 방법이다. 융합 결정이 특정 부처의 존폐를 좌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될 때,당해 부처가 정책협의나 조정에 선선히 나서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극히 비현실적이다. 그동안 융합에 대한 정책이 표류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바로 조직개편과의 연계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조직개편을 전제로 하지 말고 관계부처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어 실질적인 협업관계를 구축하고 정책 클러스터의 형성을 통한 새로운 정책 컨버전스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연락이나 조정을 위한 태스크포스 조직도 필요하겠지만,융합결정이 어느 한 부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하되,장기적으로 조직과 기능이 수렴 또는 일치되도록 관리해 나가는 지혜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끝으로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맞는 유연한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전통적 영업방식이 과도기를 거쳐 새로운 비즈니스모델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게 돕고,업종 전환이나 비즈니스모델 업그레이드를 위한 유예기간을 설정해 잠정적 보호조치를 강구하는 등 새로운 기술과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득권을 보호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접속(access),전달(transport),응용(application) 및 콘텐트(content) 등 서비스 계층(Layers)에 따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보통신정책의 틀을 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