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히말라야 기슭의 부탄 왕국이 제시한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이라는 지표가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올해로 30년여년째 재위하고 있는 왕추크 국왕은 다른 나라처럼 국민총생산(GNP)을 국가의 발전 지표로 삼지 않고,국민의 행복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부탄 왕국은 인구가 약 220만명,국민 소득은 760달러에 불과한 작고 가난한 나라다. 그런데 이 나라 국민이 느끼는 행복의 총량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많은 해외 유학생이 현지에서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고국으로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예컨대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원을 졸업한 반기얄이라는 사람은 런던의 일자리를 버리고 월급 120달러를 받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부탄의 국민총행복 개념은 30년 전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라는 책을 통해 라다크가 소개되었을 때와 비슷하게 일종의 충격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부탄과 마찬가지로 히말라야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라다크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통해 미래의 인간이 살아갈 방식을 제시했다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전세계 사람들의 가치관과 만족도 등을 조사하는 월드밸류서베이(World Value Survey)의 결과를 보면,푸에르토리코나 멕시코의 주관적 행복감이 5점에 가까운 숫자로 매우 높게 나온다. 반면,영국이나 독일 등은 3점에 미치지 못하며,우리나라는 1점을 겨우 넘는 수준이다. 이 결과는 경제적 수준과 행복이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유와 행복을 찾는 다운시프트 미래를 위해 쉬지 않고 일했지만 결국 건강만 잃고 후회하는 직장인이 많다. 가장들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해 왔지만 돌이켜 보면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 한번 제대로 갖지 못한 채 돈 버는 기계로 전락했다고 느끼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삶의 목적을 경제적 성취보다 행복 그 자체에 두는 경향이 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 자체의 행복 수준이 높아진다면 말할 것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국가 자체의 행복 수준을 바꾸는 것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 행복을 좇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삶의 속도를 줄여서 여유 있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새로운 삶의 대안이 바로 다운시프트다. 원래,다운시프트는 자동차 운전시 저단 기어로 변속하여 속도를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삶에서의 다운시프트는 삶의 속도를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유 시간이 많은 일을 찾고,같은 일을 하더라도 아둥바둥하지 않는 식으로 사는 것이 바로 삶의 다운시프트다. 국내에서 최근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 것은 외환 위기 이후 '팍팍해진' 삶에 사람들이 지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수입이 많아져도 더 많은 지출을 요구하는 사회 구조,일상화된 구조 조정,열심히 일해도 발전하기 어려운 저성장 시대와 같은 배경이 다운시프트 현상을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럽의 경우도 바쁘게 살고 삶의 질이 상대적으로 낮은 영국에서 다운시프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확산되고 다양화되는 다운시프트 다운시프트의 형태의 대표적인 형태는 귀농이나 소규모 자영업이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직장 생활보다 더 힘들다. 그러나 최소한의 경제적 목표를 세운다면,시계바늘처럼 돌아가는 일상과 조직 내 인간 관계, 끝없는 야근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사나 장사는 다운시프트의 출구가 된다. 나름대로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다운시프트의 형태는 주로 이민으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이민이라고 하면 선진국에 가서 식품점이나 세탁소를 하더라도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적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젊은 이민자들이 한국을 떠나는 주된 이유는 여유 있는 삶을 즐기고 싶다는 데 있다. 아이들의 교육도 이민 이유로 꼽히는데,그 속을 들여다보면 살벌한 국내 교육 환경을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자신은 물론 자녀에게도 다운시프트 기회를 주고 싶다는 욕구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과감한 변화가 아니더라도 다운시프트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직업이나 직장을 선택할 때 금전적 보상보다 근무 시간이나 업무 강도,휴가를 더 많이 고려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예컨데,초등학교 교사에 대한 선호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직업의 안정성도 있지만,근무 시간이 짧고 방학이 길다는 점을 선호하는 다운시프트적인 생각도 자리잡고 있다. ◆다운시프트,어떻게 대응하나 다운시프트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의 행복 수준은 낮다는 점에서,사회 전체의 행복 수준의 제고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기업 관점에서 보면,다운시프트는 명상,휴양 등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보다도 다운시프트 가치관의 확산이 일반 소비자층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 일반 소비자들도 여유,편안함이라는 가치를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런 컨셉트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선호 현상은 갈수록 강해질 것이다. 또 인력 운용 측면에서 낮은 강도의 노동을 희망하는 다운시프트 추구자들을 저렴하게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다운시프트를 희망하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임직원들에게 무급 장기 휴가 같은 다운시프트 개념의 제도를 도입해 볼 수도 있다. 김재문 연구위원 jmkim@lge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