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이뤄진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중간조사결과 발표는 과거 상당수 시국ㆍ공안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돼 왔던 국가기관 개입 및 조작 의혹에 대해 공식적으로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경찰 차원에서는 과거 인권침해와 무리한 법적용을 공개적으로 반성하면서 당시 검찰의 수사지휘와 기소에 잘못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 `검ㆍ경 수사권 조정'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의도도 함께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무리한 국가보안법 적용 비판 = 1984년 발생한 `서울대 깃발 사건'에 대해 위원회는 당시 수사를 맡았던 서울지검 남부지청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이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했음을 인정했다. 서울대 깃발 사건은 1984년 `깃발'이라는 학내 유인물이 배포된 것을 계기로 교내 학생운동 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구성원들이 국가보안법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건을 가리킨다. 당시 검찰과 경찰이 서울대 민추위를 이적단체로 규정한 데 대해 위원회는 "문서의 이적성 여부 감정이 법령상 설치 근거조차 없었던 경찰 부설 `내외정책연구소'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뤄졌고 관련자들의 자백도 위압적 분위기, 고문 및 가혹행위 위협 등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즉 일부 문건에 나온 내용과 용어를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해 `용공'으로 무리하게 규정했다는 것이 위원회의 결론이다. ◇김근태씨에 대한 고문사실 밝혀내 = 1983년 발생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사건에 대해서도 위원회는 고문과 무리한 법적용이 있었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당시 치안본부는 민추위가 민청련의 배후 조종을 받고 있으며 친북 용공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김근태씨 등 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으나 검찰은 김근태씨를 제외한 5명에 대해서는 집시법 위반 혐의만 인정하고 국보법 위반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민청련 사건은 1980년대 중반 당시 힘을 얻고 있던 민주화 투쟁의 선도 세력을 친북 이적 세력으로 몰아 일거에 제압하려는 의도가 수사 과정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 위원회의 판단이다. 특히 치안본부가 당시 민청련 의장이었던 김근태 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허위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으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언을 수사관들로부터 받아낸 것은 새로운 성과로 평가된다. ◇김기설씨 유서 필적 감정 관련 의혹 = `유서대필 사건'으로 알려졌던 김기설씨 분신자살 사건에 대해 위원회는 "김기설씨 친구로부터 새로 입수한 전대협 노트와 수사 자료 및 증거로 사용됐던 문서들을 비교한 결과 필적이 동일인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노트의 내용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당시 김씨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와 대조한 결과 일치하고 김씨 친구와 누나 등도 필적이 같다고 확인해 줬다고 위원회는 덧붙였다. ◇위원회 조사의 한계 = 그러나 이번 조사는 서류검토와 관련자들의 자발적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로 명쾌한 결론을 내리는데는 실패했다. 민청련 사건의 경우 고문 지시를 내린 것으로 수사관들에 의해 지목된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은 현재 소재 불명이며 안기부 대공수사단 간부 중 1명은 증언을 거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담당 검사는 면담조차 거부하고 있다. 또 김기설씨 분신자살 사건에 대해서는 결정적 증거로 채택됐던 유서 원본에 대한 필적 감정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유서 원본을 보관하고 있는 검찰이 `적절치 않다'며 공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2차례에 걸쳐 검찰에 원본 공개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이달 1일부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발효됐으므로 수사자료를 공개할 근거가 생겼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지난 경우 관련자들의 증언을 의무화할 방법이 현재로는 마땅치 않아 앞으로도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는 한 획기적인 상황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그는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solat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