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나이 먹어 뒤늦게 학교에 들어간 것은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공부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제 자신이 자연스레 변신하게 되면서 가슴 벅차다는 걸 느꼈습니다.


내가 좋아서 공부한 것인데 이렇게 큰 상까지 받게 되니 공부하는 것만큼 남는 장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15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2회 평생학습대상 시상식에서 개인학습자부문 대상을 받은 김순진 놀부 사장(53)은 '배운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한국전쟁 직후 출생한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집안 환경 때문에 초등학교까지 마친 후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딸인 저까지 정식 중학교에 보낼 만큼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인근 군부대에서 운영하는 임시학교에 다니게 됐죠.6개월 정도 다녔는데 집안의 어른이신 할아버지가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라는 거예요.


여자가 부대 안에 있는 학교를 오가다가 군인들에게 몸을 다칠지 모른다는 이유였죠."


이렇게 학교를 그만두고 19세에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5년 동안 김 대표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학교 대신 시장에서 파 고추 등 채소를 파는 행상을 했다.


어린 나이에도 장사에는 재주가 있었는지,꾸준히 벌어모은 끝에 단신으로 상경할 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시장에서 가장 믿을 만한 채소장수라는 소리를 들었죠.몇 푼 더 벌기 위해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운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 시절 시장통에서 커다란 채소가게를 하는 사장님보다 부러웠던 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비슷한 또래 친구들이었어요."


서울에 온 김 사장은 채소장사 경험을 바탕으로 식당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돼지갈비 해장국 백반 등 여러가지 메뉴를 시도해봤지만 조금 되는가 싶다가 결국 망하는 시행착오를 수차례 거듭했다.


장사 밑천이 바닥이 날 즈음인 1987년 서울 신림동의 5평짜리 점포에서 대박을 터뜨리게 됐다.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릴 틈도 없이 달려온 시간들이었죠.사업 성공이 일단 급했으니까요.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잡고 나니 그제서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한이 다시 사무치는 거예요."


보쌈집을 연 지 4년 후인 지난 1991년 김 사장은 검정고시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업하랴,공부하랴,애들 키우랴 1인 3역을 해야 했지만 한번 시작한 일이니 끝장을 보기로 했다.


"3년 동안 그렇게 혼자 헤맸어요.


1년에 두 번 있는 시험에 가서 운 좋으면 한 과목 패스했고 대부분은 그냥 빈 손으로 돌아오기 일쑤였죠.안되겠다 싶어 학원에 등록했지만 사업에 바빠 단기 속성 과정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죠.그래서 선택한 것이 주부학교였습니다."


집안 어른의 반대로 임시학교를 그만둔 지 꼭 30년 만이었다.


마포에 있는 양원주부학교에 들어가서 김 사장은 동병상련의 동지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차례로 통과한 김 사장은 1997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학에 들어간다.


실무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기 위해 들어간 곳은 서울보건대 전통조리과.여기서 2년 과정을 마치고 경원대 관광경영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이 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차례로 받았다.


현재는 같은 과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 제안서를 제출해둔 상태.


"사업이 커지면서 우리 놀부에도 대졸사원뿐만 아니라 석사,박사까지 들어와 함께 일하게 됐어요.


내가 오랜 사업 경험과 대표라는 지위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지만 항상 마음 속에는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사장'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었어요." 이제 그런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버리게 된 김 사장은 놀부장학회를 만들어 자신처럼 돈이 없어 학업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된 젊은이들을 돕고 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후배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있다.


평생학습대상을 받던 날에도 김 사장 축하객 중 가장 반가웠던 사람들은 양원주부학교 늦깎이 학생들이었다.


이들에게 김 사장은 '우상' 그 자체다.


주부학교 학생인 오미란씨(41)는 "김 선배가 우리학교 출신이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역경 속에서 배움의 의지를 뜨겁게 불태운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글=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