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공화국'으로 대변되는 경계론에서 각종 비리의혹과 송사(訟事), 안기부 'X파일'에서 드러난 불법 정치자금 제공 의혹, 지배구조 논란에 이르기까지 삼성은 올해 유례없이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이 "60년전 그룹 창업 이래 최악의 한해였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삼성의 올해 시련은 모두 기업외적인 요인들과 관련돼 있다. 삼성의 기업경영 실적은 나쁘지 않았다. 삼성전자가 지난해보다는 못하지만 연간 7조원 이상의 순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되는 등 주요 계열사들의 실적은 좋은 편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강력한 삼성의 성과가 올해의 잇단 시련을 초래하는 단초의 하나가 됐으며, 이런 점이 바로 재벌에 대한 일반의 곱지않은 시각과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공정거래위의 조사 방해,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발생한 참여연대측 인사의 폭행사건, 공직자 및 법조인 대거 영입 등이 여론의 빈축을 사면서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올 초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삼성은 급기야 사장단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삼성이 커지고 있는 데 대한 일부의 비판을 `더 잘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국가 대표기업으로서 경제기여도를 높이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중소기업과 어려운 이웃 등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사랑받는 기업이 되자"고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삼성의 악재는 단순한 경계론에 그치지 않았다. 10월4일에는 편법 경영권세습의 수단으로 지적돼온 삼성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 저가발행 의혹 사건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과 박노빈 현 사장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더욱이 장남 재용씨 등 이건희 회장의 4자녀에게 에버랜드 CB를 헐값에 배정하는데 그룹 비서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정황이 검찰에 포착돼 상황에 따라서는 더 큰 형사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7월에는 옛 안기부 도청팀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불법으로 도청한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의 대화 가운데 불법 정치자금 제공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음이 폭로돼 삼성의 윤리성이 다시 도마위에 올랐다. 이 사건이 불거진 후 이건희 회장은 '신병치료'를 이유로 출국해 아직까지 귀국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 체류중 역시 미국에 유학중이던 막내딸 윤형씨가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다. 삼성의 고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국정감사에 나선 국회 재경위와 법사위 소속 의원들은 이 회장을 증인으로 불러 'X파일'을 통해 드러난 정치자금 제공의혹등을 따질 계획이었지만 이 회장은 신병치료를 이유로 국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국회에서는 또 삼성의 지배구조에 큰 영향을 미칠수 있는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안이 발의돼 삼성측을 긴장시키고 있다. 여당내 일부 강경파 의원들의 안이 통과될 경우 삼성은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가운데 3.47%,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지분 가운데 20.64%를 매각해야 돼 경영권을 위협받게 되는 사태가 초래될 수도 있다. 여기에 삼성그룹은 사상 최대규모의 소송에까지 휘말렸다. 지난 9일 옛 삼성자동차 채권단이 삼성차 대출금과 연체 이자 등 4조7천억여원을 갚으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주주로서의 법적 책임을 넘어 도의적 책임까지 다하기 위해 사재인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를 부채상환용으로 출연했고 당시 채무이행 약속을 해준 것은 채권단의 강압 때문이었다는 점을 들어 채권단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채권단의 입장도 완강해 법적 공방이 불가피해 보인다. 삼성은 '삼성공화국론'을 논의했던 지난 5월말과 6월초의 사장단 회의에서 "삼성의 국가경제 기여도를 인정하는 층도 있지만 삼성의 힘이 과대하고 우수자원을 독점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는 점이 삼성경계론의 배경이 된 것으로 분석했다. 여기에 외환위기 이후 어려움을 겪은 다른 대기업과의 격차가 커진 점도 시기와질투의 대상이 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삼성은 1997년 10대 그룹내 매출 비중이 23.8%에 불과했던 것이 지난해에는 30.4%로 확대됐으며 지난해 말 기준으로 수출은 22%, 증시 시가총액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그러나 "너무 크고 강하기 때문에 견제를 받는다"는 삼성의 자체 분석은 사안의 본질인 윤리와 도덕성의 문제를 외면한 자기중심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재계와 학계의 전문가들은 삼성이 한국의 대표기업에 걸맞은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윤리를 확립하고 사회기여 및 상생경영에 앞장설 때 사랑받는 한국의 '대표기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