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영 <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sylee1657@kita.net > 지금으로부터 꼭 8년 전 오늘은 우리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날이다. TV 앞에 모여 앉은 국민들은 'IMF 구제금융 요청' 발표를 당혹과 우려의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1997년 한 해가 한보철강 부도로 시작해 56억달러의 IMF 1차 지원금을 제공받으며 끝난 것이다. 외환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다. 정경유착,금융부실,차입경영,부패관행,문어발식 확장 등 우리 경제의 취약점들이 동시에 노출되면서 터졌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곧바로 수습에 나섰다. 사상 초유의 구조조정 속에서도 '나라 살리기'에 동참하는 열기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너나할 것 없이 장롱 속에 묻어 두었던 금붙이를 꺼내들고 장사진을 쳤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결국 우리는 1997년 IMF에 구제금융 요청할 당시 바닥을 보였던 외환보유액을 불과 3년 만에 1000억달러 이상으로 늘렸고,82억달러 적자였던 경상수지도 2000년에는 118억달러 흑자로 돌려놨다. 구제금융 용도로 IMF에서 빌려온 빚도 4년도 안돼 모두 갚아버렸다. 우리 사회에 드리운 외환위기의 먹구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 것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지만,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한국경제가 반석 위에 올라선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국민성처럼 외환위기도 '빨리 빨리' 극복했지만,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위기론','대란설'은 한국경제가 여전히 취약함을 뜻한다. 위기상황에 대한 진지한 인식과 심도있는 반성,철저한 극복이 뒤따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최근 주가가 1200포인트를 웃돌고 4·4분기 성장률이 5%대를 회복할 것이란 말이 나오면서 낙관론이 세(勢)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경제를 단독 견인 중인 수출 역시 미국 금리인상이 전 세계로 확산돼 세계경제 경착륙과 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질 경우 당장 내년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고령화,저출산 등 엄청난 비용이 드는 구조적인 과제도 많다. 한국사회의 미래는 경제주체 모두의 위기관리 능력,아니 위기예방 능력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취약해진 시장기능을 확충하고 안정적 거시경제 환경을 조성하며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1830년 행한 '세계역사의 철학에 관한 강연'에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고 있지 않다"고 한 말이 유독 통렬하게 들리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