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다.우리나라에서 매일 평균 32명이 자살하고 있다는 것이다.그 가운데 11명은 60대 이상의 고령층이다. 지난달 말 통계청이 발표한 '2004년 사망 원인 통계 결과'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 당 연간 자살자 수로 계산되는 자살률은 지난해 24.2명으로 최근 10년 동안 갑절 이상 늘어났다. 자살률,노인 자살률,자살자 수 증가율 등 자살 관련 지표의 수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한국 사회의 우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자살은 개인적 성향,사회제도,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경제적 요인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진단이다.우리나라에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과 신용카드 사태가 터진 2002년,그리고 3년여에 걸친 내수 불황이 절정에 이른 2004년 자살률이 급증한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극심한 경기 침체로 인한 실직,사업 실패,생활고 등이 한계선상에 있던 사람들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고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까지 커다란 변화 없이 평균 10명 안팎을 유지하던 자살률은 1998년 19.9명으로 급증했다.경기 침체에다 대량 가계 파산까지 겹친 2002년에는 자살률이 교통 사고로 인한 사망률과 맞먹는 수준으로 높아졌다.수출 급증과 내수 침체가 극심한 대조를 이룬 지난해에는 자살률이 25.2명으로 증가해 외환위기 당시 수준을 넘어섰다. 우리나라에서 경제성장률,실업률 등의 경제 지표와 자살자 수 증가율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즉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거나 실업률이 높아지거나 가계 부실이 커지면 자살자 수가 증가하는 것이다.1991~2003년 이들 경제지표와 자살률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외환위기 이후 경제 상황이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외환위기 전에 비해 훨씬 커졌다는 점이다.이는 사회 경제적 변동이 극심할 때 자살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학계의 관찰과 부합한다. 둘째,경제성장률과 실업률 등 경제 성장과 관련한 지표뿐만 아니라 소득 분배 지표와 자살 증가율 간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그 경로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상대적 빈곤감과 자살 간의 높은 관련성을 시사하는 분석 결과다. 한편 인구구조 변화도 경제 환경 못지않게 자살과 높은 상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최근 20여 년 동안 노인 자살의 급증세가 두드러지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1983년에는 연령대별 자살률이 10대를 제외하고는 10~16명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반면 20년 뒤인 2003년의 경우 80대의 자살률이 116명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70대 76명,60대 50명,50대 35명,40대 28명 등으로 낮았다.연령대가 높을수록 자살률이 증가하는 양상이 뚜렷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전되는 가운데 고령화 사회에 대응할 만한 적절한 제도적 기반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사회적 보호 없이 빈곤과 질병, 소외감 등에 그대로 노출된 고령자 가운데 자살을 강행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자살 증가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우리나라 인구구조는 급속히 고령화하고 있는 데다,'잠재성장률 저하' 및 '소득 양극화 심화' 추세를 쉽게 되돌리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의 오명을 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의 성장 활력을 되찾고 일자리를 많이 창출해야 한다.하지만 경제 성장 만으로는 부족하다.소득 분배와 인구구조 역시 자살 등 사회 병리의 중요한 원인임을 감안해 빈곤층과 고령층을 위한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을 갖추는 것이 긴요하다. 경제 활성화 정책 마련과 사회제도 정비 이외에 사회 전반의 활력 회복도 병행돼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흔히 우리 사회를 '패자 부활전이 없는 사회'라고 한다.급격한 사회 변동과 고속 성장의 후유증으로 무한 경쟁과 출세지향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있다.경쟁에서 진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아량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패자 스스로도 재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쉽게 절망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사회는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승자는 패자를 따뜻이 위로하고,패자는 길게 내다볼 줄 아는 지혜가 절실하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연구원 hybae@lge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