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창수 <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 이번 일본 중의원 선거 유세과정에서 보여준 일본 국민들의 모습은 이전 선거 때와는 달랐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유세장은 언제나 젊은이와 아줌마들이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고이즈미'를 연호한 데 비해, 민주당은 잠자코 듣고 있는 노인층이 많았다. 2003년의 중의원 선거와 비교하면 자민당과 민주당이 뒤바뀐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러한 일본 국민들의 흐름을 반영하듯 이번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예상보다 많은 의석을 확보하면서 압승했다. 선거전 212석에 불과했던 자민당은 296석을 차지하면서 자민당 단독정부 붕괴 이후 15년 만에 기록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자민당의 압승은 고이즈미 총리의 우정민영화를 통한 개혁정치를 국민들이 높이 평가하고 지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정 민영화에 반대하는 야당과 자민당 내 일부 세력을 개혁 반대 세력이라고 단정짓는 고이즈미 총리의 단순 명쾌한 논리가 유권자들에게 먹혔다. 또한 고이즈미 총리가 자민당내 우정 민영화 반대파들을 몰아내고 해당 지역구에 여성 후보들을 표적 공천하여 화려한 '극장형 선거전'을 펼친 것도 주효했다. 우리가 관심있게 봐야 할 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선거 전략이 일본 정치에 미친 영향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인기를 등에 업은 자민당의 압승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존의 자민당 지지 기반을 약화시킴으로써 당 내부의 질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인기는 우정 민영화를 통해 자민당 지지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린 개혁 이미지에 기인한다. 이로써 자민당이 지금껏 의존해왔던 조직에 의한 선거는 사실상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이를 복원하기가 쉽지는 않게 됐다. 그 결과 후원회를 중심으로 한 패쇄적인 민의가 전달되는 일본식 민주주의 모델이 여론에 민감해지는 개방적인 민주주의 모델로 변화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고이즈미 총리가 주장하는 우정 민영화를 포함한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에 일본 국민들이 컨센서스를 갖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일본 정치는 자민당이 업계 단체와 유착해 재분배를 중심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혁신세력도 이에 동조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결과를 볼 때 일본 국민들이 더 이상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현상유지 정책은 불가능하며, 앞으로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더욱더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를 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일본 정치는 기존의 재분배형 정치에서 탈피해 시장논리가 우선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치의 흐름으로 정착하게 됐다. 그러나 이번 선거 결과가 일본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만은 아니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외교안보와 국제질서에 대한 논의는 쟁점화되지 않아 고이즈미 총리의 대(對)아시아 외교 향방을 둘러싼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즉 고이즈미 총리는 자민당 압승을 디딤돌 삼아 종래의 미국 추종노선과 대아시아 갈등을 지속시켜 한국 및 중국과 거듭 외교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선 고이즈미 총리가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할 가능성이 높아져,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또한 11월 자민당의 헌법 개정 초안 발표를 계기로 헌법 개정 논의가 적극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동북아 구도는 다시 흔들리고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좋아질 수가 없다. 이번 자민당 압승으로 반대파가 '독재자'로 부를 만큼 매사에 독선적이고 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생각하지 않은 고이즈미 총리가 더욱 큰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