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명 < 한림대 교수·정치학 >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대연정안에 대해 한나라당이 굳게 반대하고 국민들도 냉소적이다. 대통령은 한국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대연정이 필요하고 그것이 안 되면 선거구제라도 고쳐야 한다고 굳세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진정성'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국민과 야당을 원망한다. 나는 그의 진정성을 믿는다. 그래서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그가 진정성이 부족하고 당리당략에만 얽매여 대연정을 내세운다면,정치인들이란 으레 그렇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지역주의가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서 대연정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면,그것은 당리당략의 얕은 수보다 한국을 더 혼란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착각이다. 그러한 잘못된 현실 인식과 빗나간 소명 의식이 승부를 걸기 좋아하는 그의 성향과 결합할 때 한국 사회는 불필요한 혼란과 갈등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가장 대표적인 고질병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른바 3김 정치가 끝난 지금 그것은 서서히 약화되고 있다. 3김 정치 시대라 하더라도 우리의 지역주의는 어떠한 정치 폭력도 불러일으키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5공 청산 등 민주화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다. 선거에서 나타난 지역 몰표와 지역간 불균등 성장이 한국 지역주의의 병폐이기는 하나,그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엄청난 문제는 아니다. 지역주의는 그냥 둬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약화될 것이다. 그리고 지역주의가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다. 뚜렷한 이념 격차나 정책 쟁점이 없는 상황에서 고향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유권자가 후보자에 대해 샅샅이 알고 정책을 보고 투표하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면 정치학자인 나도 그럴 의향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든 당이든 정치세력들 사이에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선거구제를 개편함으로써 지역주의 투표는 상당히 완화할 수 있다. 특히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고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활용하면,지역주의를 줄이고 정당 사이의 정책 대결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나 여당이 선거구제 개편을 원하는 것은 호남에서 자기 세력을 쌓기 위해서이니 좋은 명분의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 문제는 정당들끼리 타협하고 국회에서 의결하면 되는 것이니,쓸데없이 또 국민 피곤하게 만들지 않기 바란다. 지역주의보다 더 근본적인 한국 정치의 문제는 정치인의 자질이다. 이 해묵은 문제는 지난 해의 대통령 탄핵 소동과 올해의 대연정 분란에서 더 분명해졌다. 이런 쓸데없는 분란들은 한마디로 정치인들의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지금까지 정치인의 자질이라고 하면 주로 부정부패 문제나 학벌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었으나,그것은 오히려 지엽적이다. 근본적으로 정치인은 자기가 왜 정치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정치인들에게 물으면 십중팔구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정치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믿을 국민은 아무도 없다. 십중팔구 자신의 입신 영달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하는 일이란 국민 아닌 자기 이익을 가지고 싸우는 당파싸움일 뿐이다. 정치인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건 국민에 대한 봉사 정신이고,이를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현명한 판단력과 건전한 양식이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부수적일 뿐이다. 이 덕목들을 고루 갖춘 정치인이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 한국 정치의 근본 문제는 거기에 있다. 이는 결코 지역주의나 대연정이나 선거구제 개편에 가려질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