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를 외환 위기로 몰아 넣은 원인을 제공했던 1997년 기아차 부도 사태가 8년여만에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됐다. 검찰이 민주노총과 기아차 노조가 이달 1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및 횡령, 형법상 뇌물공여죄 등으로 고발한 사건과 관련, 참고인 조사를 벌인 뒤 수사 일정을 잡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참여연대가 이미 이 회장과 강씨를 삼성의 기아차 인수 로비 혐의로 고발했기 때문에 기아차 부도 사태 관련 수사는 참여연대 고발 사건의 일부분으로 묻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기아차 노조를 참고인으로 조사하면 수사 절차상 피고발인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회장과 강씨는 기아차 부도 사태와 인수로비 의혹에 대한 검찰 조사를 비켜갈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에 대한 조사 결과에 따라서는 안기부 X파일 내용에서 삼성의 기아차 인수에 힘을 실어준 것처럼 발언한 것으로 돼있는 당시 여야 대선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씨에 대한 조사도 배제할 수 없다. ◇8년 전 무슨 일 있었나 = 삼성의 기아차 인수설은 자동차 마니아로 알려진 이건희 회장 주변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지만 본격화된 것은 1993년부터다. 당시 증권가에서는 삼성이 기아차 주식을 매집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실제로 삼성생명 등 계열사들이 10%에 가까운 기아차 주식을 사 모은 게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1997년 8월 22일 기아차는 `그룹 자동차사업 조기 경쟁력 확보를 위해 쌍용 및 기아차 전략적 인수를 추진한다'는 삼성의 내부 보고서 유출로 다시 인수설에 휘말리며 휘청거렸다. 이에 삼성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폐기된 보고서라고 해명했지만, 기아차 인수설은 오히려 증폭됐다. 그러나 삼성은 1998년 기아차의 매각 방침이 정해져 국제 공개입찰방식에 따라 진행된 3차례 입찰에 제안서를 접수, 실제로 인수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삼성의 로비 의혹과 음모론도 불거졌다. 기아차는 1997년 6월 금융권의 집중적인 자금회수로 인해 계열사인 아시아자동차가 부도설에 휘말렸고,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은 국회 IMF 환란조사 특위에서 "삼성의 기아 흔들기로 (97년) 4월 이후 3개월간 종금사들로부터 5천500억원의 단기자금을 회수 당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에 삼성은 "기아차 부도 원인은 부도덕한 전문경영인이 구속되는 등 부실경영에 있었다"며 음모론과 로비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수천억 피해 기아차 사태 규명될까 = 유형무형의 수천억원대 피해를 불러온 기아차 부도 사태 의혹은 X파일 공개 뒤 도청 파문과 `떡값 검사' 논란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지만, 적지 않은 파괴력을 지닌 사안이다. 로비 의혹이 규명될 경우 특가법상 뇌물죄의 공소시효(10년)가 남아 있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홍석현 주미대사와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의 대화가 도청됐다는 1997년 추석 무렵은 기아차 공개입찰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대선도 임박한 시점이어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서 드러난 기아차 관련 내용은 X파일 폭로 이후 줄곧 로비 의혹으로 확대됐다. 검찰이 기아차 인수 로비 의혹에 대해 전면 수사를 벌이게 되면 여야 대선후보 및 강경식 당시 부총리에 대한 지원 방안을 놓고 홍 대사와 이 본부장이 나눈 대화 내용과 물증 확보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부실 경영과 이기적인 노조의 파업 때문이었다'는 1997년 당시의 기아차 부도 사태 배경을 새롭게 밝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기아차가 현대차에 인수된 지 8년이 돼가고, 삼성도 자동차 산업에서 사실상 손을 뗐기 때문에 관련 자료가 온전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로비 의혹과 관련해 당시 여야 대선후보를 조사해야 하는 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검찰이 형식적으로 피고발인 조사를 마무리 짓고 `로비설'에 면죄부를 주는 식으로 수사를 마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기아차 부도 사태에 대한 검찰 조사가 겉핥기 식으로 끝나면 노동계의 전면 반발로 비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검찰로서는 이번 수사를 놓고 적지 않은 고민을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에서 `부도덕한 경영진과 노조가 기아차 사태를 유발했다'며 뭇매를 맞았던 노동계가 무노조 경영을 고수하고 있는 삼성에 맞서 `명예회복' 차원의 진실 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할 경우 극한 대립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점도 향후 검찰 수사에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연합뉴스) 이광철 기자 mino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