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원 < 메트로뱅크 서울지점 부지점장 marianneseok@yahoo.com > 우리 집 베란다에는 잎이 무성한 관음죽 화분이 있다. 17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남긴 유산이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들이 많던 시절,고등교육까지 받은 아버지였지만 결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는 생을 살다 가셨다. 어린 시절,나를 데리고 산책할 때마다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뜻을 크게 세워야 한다는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시던 아버지.아버지는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 안달하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사업에 실패하면서 아버지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늘 생각했다. '난 아버지처럼 실패하지 않을 거야! 실패하더라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거야!' 자식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항상 미안해 하셨다. 그저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만 계속하셨다. 아버지는 소일거리로 산책을 즐기셨는데 서울로 이사오기 전엔 네잎클로버 찾기를 좋아하셨다.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아마 늘 행운을 갈망하셨나 보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렵게 찾은 네잎클로버는 항상 내 차지였다. 책갈피에 넣어 잘 간직하라면서 언제나 내게 주셨으니까. 서울로 온 뒤,아버지는 서초동에서 봉은사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매일 산책을 하셨다. 그런데 하루는 관음죽 한 가지를 들고 오셨다. 절에서 가지치기를 하며 버린 것인데 뿌리를 내리면 잘 자랄 수 있다고 하시며 화분에 심으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일년을 병석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처음엔 무심코 관음죽 화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유산."돈을 많이 벌어 좀 넉넉한 유산을 남겨주셨으면 얼마나 좋아.겨우 화분 하나라니." 그런데 몇 번 분갈이를 하고 해가 바뀌어도 계속 잘 자라는 관음죽이 신기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아버지의 생명이 그 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아 자주 눈길을 주게 되었다. 그러다 기특하게도 아버지의 진짜 유산이 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을 크게 세우라고 하셨기에 삶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않았고,실패의 씁쓸함을 알게 하셨기에 오뚝이 정신을 키울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잘할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신감을 잃지 않았고,항상 행운을 선물해 주셨던 까닭에 인생의 고비마다 행운이 깃들었다. 예전엔 어리석어 화분만 유산으로 여겨졌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은 하나둘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