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 < 법무법인 율촌 미국변호사ㆍ고려대 경영대 겸임교수 > 기업의 경영권 방어 장치인 이른바 독약증권(Poison Pill)에 대한 관심이 높다. 2003년 말 현재 2058개 미국기업들이 채택하고 있고 S&P500 기업들의 약 60%가 채택하고 있는 이 장치는 우리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독약증권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적대적 M&A의 대상이 된 회사 경영진이 그 주주들에게 회사의 신주나 자기주식을 매우 낮은 가격에 살 수 있는 콜옵션을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인수가격을 비싸게 해서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독약증권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이것이 경영권을 고착시키는 데 사용되는 장치라는 것이다. 즉 현 경영진의 지배력을 확대,유지하는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독약증권은 원래 적대세력과의 관계에서 회사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82년 립튼(Lipton) 변호사에 의해 고안된 독약증권은 19세기 말 록펠러가문을 위해 고안됐던 신탁제도와 함께 미국 기업사의 2대 발명품으로 불린다. 독약증권이 있기 때문에 회사의 이사회는 회사와 주주들에게 해로울 것으로 보이는 M&A를 거절할 수 있으며,반대로 회사와 주주들에게 도움이 될 M&A에 당면해서는 협상력을 극대화해 조건에 합의한 후 독약증권을 폐지하고 거래를 성사시킨다. 독일에서는 독약증권을 '쓴약증권'이라고 번역한다. 즉 먹어도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J P 모건은 1993년에서 1997년 6월 사이에 발생한 5억달러 이상의 경영권 이동을 수반하는 M&A를 분석한 결과를 1997년 7월에 발표한 바 있다. 이 조사에 의하면 독약증권 장치를 갖춘 기업의 주주들이 그렇지 못한 기업의 주주들에 비해 약 10%가 넘는 추가적인 프리미엄을 받고 경영권을 양도했다. 또 1988년과 1997년 사이에 발생한 모든 적대적 M&A에 있어서 독약증권 장치를 갖춘 기업의 주주들은 그렇지 못한 기업의 주주들에 비해 약 14%가 넘는 추가적인 프리미엄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미국에서는 독약증권의 경영권방어 기능이 다소 감소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그 이유는 적대적 M&A에서 제시되는 프리미엄이 대단히 커지는 경향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프리미엄이 큰 경우 주주들이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측에 호의적이 되기 쉬우며 회사의 이사회도 경영권방어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어렵게 된다. 이로부터 독약증권이 경영권방어를 위한 견고한 장치가 아니라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경영진의 협상력을 높이는 장치라는 것이 잘 드러난다. 미국의 텍사코가 1989년에 채택했던 독약증권은 독약증권이 주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텍사코는 도산한 뒤 회사정리계획에 대해 주주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 당시 채택하고 있던 독약증권을 폐지하고,주주들이 승인하거나 투자은행이 주주들에게 공정하다고 인증하는 내용의 독약증권을 이사회가 다시 채택하기로 하는 정관개정을 주주들에게 제안했다. 텍사코의 주주총회에서 이 정관개정안은 84.2%의 찬성으로 채택된 바 있다. 일본은 2001년 11월 상법개정으로 독약증권의 사용을 가능하게 했는데 내년 4월을 목표로 한 추가 상법개정으로 이를 더 명확히 하려 한다. 지난 3월 공개된 일본정부 스터디그룹의 보고서는 독약증권을 포함한 경영권방어 장치의 도입이 일본 기업들의 경영진에게 적대적 세력과의 협상을 보다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어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글로벌 시장과 기업환경에서 '경영권방어'라는 개념은 우리가 '재벌개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