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그린스펀과 박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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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미국 텍사스주 크로퍼드 목장.휴가중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기자들과 만나 "미국 경제가 다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고 선언했다.
한 기자가 "금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금리는 전적으로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몫이다. 나는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의 판단을 믿는다. 그는 정치가 아닌,팩트(사실)에 기초해 통화정책을 결정한다."
그린스펀 의장이 왜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내년 1월 퇴임 예정인 그의 '무게'는 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와이오밍주에서 열린 연례 FRB 심포지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우선 주제부터가 '그린스펀 시대-미래를 위한 교훈'이었다.
발표자들은 그린스펀을 한껏 치켜세웠다.
로버트 루빈 전 재무부장관은 "다음 FRB 의장은 경제적 슈퍼맨이 돼야 한다"며 "그린스펀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교수는'그린스펀의 통화정책 10대 원칙'을 제시하며 후계자들은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린스펀 자신도 예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주택 경기는 필연적으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정면으로 주택경기 과열을 경고했다.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같은 애매모호한 발언에 익숙해 있던 시장참가자들로선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발언은 한층 무게있게 전달되며 '그린스펀 신드롬'을 더욱 부풀렸다.
한국에서 그린스펀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박승 한국은행 총재다.
물론 두 사람을 곧바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경제 관료들이 툭하면 "콜금리를 내렸어야 했다"(작년 10월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거나,"금리인상은 절대 없을 것"(올 8월 한덕수 경제부총리)이라며 공개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한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스펀과 박승 한은 총재의 무게(특히 입)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린스펀의 입은 "그의 권위는 입에서 나온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무겁다.
어떤 기자가 환율에 대해 묻자 여러차례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요청한 뒤 그가 한 말이라곤 고작 "노 코멘트(No comment·할 말 없다)"였을 정도다.
반면 박 총재의 입은 '설화(舌禍)'로 더 유명하다.
작년엔 금리정책에 관한 말뒤집기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더니만,올해는 국제금융시장에서 'BOK 쇼크'를 초래하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임기를 채우는 몇 안되는 한은 총재이면서도 공적이 잘 부각되지 않는다.
마침 박 총재의 임기(내년 3월 말)를 앞두고 후임 총재에 대한 하마평(下馬評)이 나돈다고 한다.
최근 미국에서 일고 있는'그린스펀 신드롬'을 보면서 이젠 우리도 그린스펀 같지는 못하더라도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중앙은행 총재를 가져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영춘 뉴욕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