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형 선 < 연세대 교수·보건행정학 > 국민의 '건강'을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지만,서구 선진국 중 의료 이용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맡겨놓은 국가는 없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본적 의료에 대한 접근성의 보장은 국가의 기본책무로 돼 있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적으로 재원을 조달하면서 누구나 필요시 부담능력에 관계없이 의료를 보장받는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의료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이라는 인권의 기본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의 정보불균형이 현격하다는 점 때문에 다른 어떤 서비스보다도 제3자의,정확히는 공공부문의 개입이 불가피하게 된다. 다른 여러 분야에서 부러움을 사고 있는 미국이 의료제도의 성과평가에서만은 OECD 국가 중에서 하위의 점수를 받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을 소홀히 한 때문이다. 의료기관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는 특수성을 가진다. 의료서비스에도 산업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산업적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향상시키는 의료기관 고유의 역할이다. 의료정책에 있어서 산업이익과 국민의 건강권 확보가 모두 추구돼야 하겠으나,양자가 배치되는 상황이 있다면 국민의 건강권 확보가 우선될 수밖에 없다. 이는 서구 모든 국가들에서 널리 인정되는 규범이며,의료시장개방 논의에서도 이 원칙은 훼손되지 않고 있다. 의료시장 개방을 앞에 놓고 큰 일이 벌어질 듯이 하는 국내의 논의와는 달리,외국의 어떤 국가도 상대국의 국내 의료보장 체계에 대해서는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최근 한경 다산칼럼 '국민건강,정부가 책임질 수 있나'가 의료와 관련한 몇 가지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촉구한데 대해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주장대로 정부와 시장의 역할은 구분돼야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각각의 역할을 어떻게 정하는가이다. 기본급여 영역의 보장은 정부의 책무에 해당한다. 이를 넘어선 추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시장의 기능을 살려 반응성(responsiveness) 높은 의료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국가의 책무라고 해서 영국 등 국가의료제도(NHS)형 국가들처럼 국가가 직접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필요는 없다. 공보험제도를 활용하면 된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공보험에서 제외해 민영보험에 맡기는 것은 현행 우리의 의료보장 성숙도를 고려할 때 위험한 생각이다. 저소득 취약계층만을 공보험 내지 정부가 책임지고 나머지는 민영보험에 맡기는 미국이 결국은 다른 나라의 몇 배에 달하는 국민의료비를 쓰고서도 국민의 4분의 1을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함으로써 그 상당수가 자선적 의료서비스에의 의존을 강요당하고 있지 않은가. 향후 우리의 의료보장이 충분히 성숙한 뒤에는 일부 국민의 다양한 욕구에 대해 민간보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형평성 감소에 따른 부작용보다는 반응성의 증대에 따른 의료제도의 성과 향상이 더 클 수 있다고 판단되면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필수의료를 넘어서는 편의(amenity)지향적 서비스는 전액 자비부담으로 하건,민영보험을 통해 위험분산을 하건 개인이 선택하게 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건강보험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단계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국민을 암과 같은 중증 고액 상병의 치료비 부담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는가이다. 그 핵심은 본인부담 완화를 위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