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德根 <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2003년 6월 미국 정부가 44%라는 전례없는 고율의 상계관세를 하이닉스반도체에 부과하면서 촉발된 분쟁은 지난달 말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가 미국측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종결됐다. 이번 결정은 특히 지난해 12월 한국측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패널 판정에 한껏 안도했던 우리 정부에 매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 반도체업체인 하이닉스의 대미수출이 당장 타격받게 됐을 뿐 아니라,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차원에서 우리 정부가 취한 조치가 부당한 정부보조금 지원행위로 결론났기 때문이다. 이번 판정은 현재 진행중인 유럽연합(EU)의 35% 상계관세 분쟁절차에도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유럽시장에 대한 반도체 수출도 당분간 애로를 겪을 전망이다. 일본정부도 이번 WTO 판결을 지켜본 뒤 상계관세 부과를 결정한다며 잠정 유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판정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WTO가 금융산업부문에 대한 우리 정부의 지시 및 위임 관행에 대해 이를 부당한 보조금행위라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앞서 미국 상무부가 2000년 한국산 철강제품에 대해 상계관세를 부과하면서부터 주장해 온 것으로,WTO내 최고판결기구인 상소기구마저 이를 인정했다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현재까지 보조금과 관련된 WTO 분쟁은 회원국 정부의 다양한 지원정책이 늘 도마에 올랐지만,정부가 시중 금융회사에 대해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사실상 정부보조금을 지원하게 했다는 판정은 선례가 없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 시행단계에서 당시 재경부와 금감원이 시중은행에 대출압력을 넣었다는 증거로 언론기사와 보도자료 등을 제출했는데,WTO는 이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한국 정부의 지시 및 위임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WTO의 판단은 우리 정부의 정책시행 방식과 관련해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선 금융규제와 관련,시장개입이 불가피하다면 최소한 그 방식만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의 일상적이고 관행적으로 시행하던 행정지도나 지시가 현단계의 국제통상체제에서는 불법적인 보조금 행위로까지 간주될 수 있다는 교훈을 새겨야 한다. 이번 소송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당시 시중은행으로 구성된 채권단에는 외국은행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을 들어 정부의 압력행사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미국은 도리어 이것을 두고 한국에서는 외국은행까지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야 하는 시장규제환경이 조성돼 있는 증거가 아니냐고 반박했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 정부의 보조금 문제는 비단 금융회사에 대한 압력차원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경제는 유례없이 성공적이었던 정부주도형 경제개발정책의 경험 때문에 정부보조금 정책에 대한 회귀성이 어느 국가보다 강하다. 특히 최근에는 저성장과 심지어 장기불황 징후의 우려 속에 대규모 산업육성정책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원천기술개발 지원에 주안점을 두는 연구개발 지원사업의 경우에도 조기 상용화 및 산.관협조 등의 명분 아래 관련 기업을 보다 직접적으로 사업의 주체나 전면에 참여시키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국제통상환경은 지난 70,80년대와는 판이한 WTO 체제 속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몸집을 불린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활개를 치도록 147개 WTO 회원국들이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칫 그로 인해 수십배의 피해를 불러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닉스만 하더라도 제3국 시장을 활용함으로써 상당부분 피해를 줄일 수 있겠으나 우리 경제는 제3국 정부를 활용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