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국가만족도, 그 우울한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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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일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
10년 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이야기를 했다. 세계수준을 따라 잡으려면 한국은 더 분발해야 하고 그래도 기업이 좀 나은데 후진적인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했던 그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것은 최근 한국경제신문이 발표한 국민들의 국가만족도 조사결과를 보고 나서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들의 국가만족도는 36점(100점 만점)이고, 국내 정치ㆍ경제ㆍ사회 분야의 각종 제도와 환경들이 국민들로부터 대부분 낙제점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설문 평가항목에서 '보통'은 50점, '약간 불만족'은 25점이었다). 역시 한국고객들은 까다로웠다. 아니, 한국의 수준이 아직까지는 이 정도밖에 안된다. 계층별로는 50세 이상의 고령층,자영업자,대도시 거주자들의 국가만족도가 다른 집단보다 낮았고, 분야별로는 정치에 대한 만족도가 경제, 사회보다 저조했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두 가지다. 첫째, 기업과 정치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렸다는 것이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에 대한 평가는 전체 항목 중 두번째로 높은 점수(48.3점)를 받은 반면 국회 만족도는 최하위(22.1점)를 기록했다. 국회와 기업이 이처럼 상반된 점수를 받은 것은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세간의 인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사회일각의 반기업 정서와 정부여당의 반재벌 정서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기업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환경에 노출되어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생존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해 왔기 때문이다.
둘째, 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족은 심각한 상태(26.4점)다. 교육환경이 비교적 잘 갖춰진 대도시 거주자들의 만족도가 농어촌 지역 거주자들의 만족도보다 훨씬 낮았다는 결과는 역설적이긴 해도 의외이지는 않다.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심각한 불만족과 대도시 거주민들의 민심이반은 이젠 외국언론에서조차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기러기 가족'의 유래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교육에 대한 불만족이 계속된다면 '기러기 가족'현상은 더 확산될 것이라는 어두운 조짐까지 예고한다.
2005년 현재 한국의 자화상은 이처럼 우중충하고 우울하다. 어느 하나 한국민들이 느끼기에 아직 일류는 어디에도 없다. "기업은 잘 나가는데, 정치는 후진적이다"라고 좋아할 것도 아니다. 기업들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높지만, 절대적 수준으로는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당장은 후진적인 정치가 기업의 발목을 잡고,장기적으로는 퇴행적인 교육이 기업의 인력공급을 저해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야기는 다시 10년 전 이건희 회장이 느꼈던 그 절박감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우리는 절박하고 목 마르다.
동시에 우리는 10년전 진단되었던 시스템의 문제, 제도의 문제에서 별로 달아나지 못했음을 발견한다. 작년 WTO 쌀협상 과정에서 이면합의로 협상결과를 축소, 왜곡했다는 의혹은 수년 전 중국과 마늘 협상파동의 재연이고,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투자 파문은 정권때마다 반복되는 권력형 비리의 반복이다.
이달 중 대통령 주재로 4대 그룹 총수가 참가하는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 토론회'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 토론회에서 대기업들은 협력 중소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방안을 밝히고, 정부는 중소기업과 협력하는 대기업들에 대한 인센티브 조치를 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한국의 정치와 행정은 아직도 개발연대의 방식에서 별로 탈피하지 못했구나 하고 씁쓸한 느낌을 가진 것은 나 뿐이었을까?
이 해묵은 문제에 대해 아직도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을까. 물론 대화와 설득은 언제나 중요한 정치적 도구이지만, 제도가 정착되고 선진적인 관행이 일반화되고 기업인,정치인,국민들이 그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그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