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관련법안에 대한 국회 차원의 사회적 대화가 당초 기대와 달리 지나치게 정치화 부실화되고 있다. 당초 정부법안을 중심으로 노사단체와 정부 여당간의 협의가 비교적 잘 진행돼 왔으나, 지난 14일 관련법안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표명을 계기로 대화가 파행의 길로 들어섰다. 노동계가 마치 정부 여당과의 기세싸움에서 승기를 잡았다는 듯이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마련된 대화테이블을 뛰어 넘어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철야농성 등 대중투쟁을 통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계의 태도변화는 노동계의 진정한 대화의지를 의심하게 할 뿐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의 올바른 해법마련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를 어렵게 할 것이다. 이렇게 쌓인 불신과 갈등의 씨앗들이 사회적 대화자체를 또다시 붕괴시킬 위험도 있다. 인권위가 제시한 비정규직에 대한 사용사유 제한과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새로운 의견이 아니다. 이미 지난 2년 반에 걸친 법안 마련 과정에서 충분히 검토됐지만 선택되지 않았던 하나의 방안에 불과하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인권신장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비정규직 사용을 가능한 어렵게 하고 차별을 철폐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규제하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시장이 이러한 입법취지에 맞게 작동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강력한 규제와 보호방안을 택하지 않았던 것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정책의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이것이 오히려 무분별한 아웃소싱과 파견, 노무도급을 양산할 수 있고 중소기업들의 해외이전을 더욱 촉발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외국과 같이 직무나 직종 중심으로 짜여져 있지 않고 기업 중심의 연공체계가 강한 현실을 감안할 때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관철시키는 것도 의욕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노동시장규제법을 제정하면서 공급자인 노동자의 인권만을 고려할 수는 없다. 수요자인 기업의 법 순응도를 감안해 법안을 만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하여간 인권위가 매우 미묘한 시점에 구체적인 견해를 공개함에 따라 국회 차원의 막판 의견조율은 큰 난항을 겪게 됐고 4월 임시국회 처리도 불투명해졌다. 이렇게 결정이 지연되는 것이 비정규직 문제해결이나 사회적 대화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노사는 오히려 임·단협 시즌을 맞아 원칙적인 입장만을 되풀이 주장하는 비생산적인 정치공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노동계는 인권위와 시민사회단체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정부와 재계를 상대로 한 정치공세의 유혹을 느끼고 있다. 이 길은 노동계에 아주 익숙한 길이나 분명 미래의 노동운동이 지향해야 할 길은 아니다. 이러한 선택은 노동계 지도부가 정치적 부담을 일시적으로 회피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현실을 바꾸는 데에는 도움이 안되며 오히려 문제해결을 더욱 지연시킬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는 노동계 지도부가 좀더 정직하고 용감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노동계가 져야 할 책임과 양보의 몫을 뒤로 한 채 상대방의 의무와 책임만을 요구할 때 대중투쟁은 살아날지 모르나 사회적 대화는 공전되고 타협은 헛구호에 그치게 된다. 노동계가 진정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찾고자 한다면 법개정 투쟁에만 매달릴 필요도 없다. 현행 법제도 하에서도 노·사·정이 서로 양보하고 결단만 내린다면 비정규직의 처우개선과 남용 최소화 방안들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 스스로 정규직 임금안정과 배치전환의 유연성 보장 등을 약속하면서, 재계의 하도급구조 개선과 아웃소싱 최소화를 요구하고 정부에 대해서도 기존의 근로기준법과 사회보험제도를 제대로 운용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패키지를 갖고 노·사·정이 다시 한번 진지한 대화에 나설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