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지난 콘클라베 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탄생은 전혀 예상 밖 결과였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가 즉위 33일 만에 선종했을 당시 아무도 카롤 요제프보이틸라(요한 바오로 2세의 본명) 추기경이 후계자가 될 지 예상하지 못했고 바티칸 밖에서는 그 이름을 들어본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콘클라베 추기경단을 대표해 페리클레 필리치 추기경이 성베드로성당 회랑에 나와 낭랑한 라틴어 발음으로 "카롤룸 카르디날렘 보이틸라"라고 신임 교황의 이름을발표했을 때 기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누구?"라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당시 콘클라베를 취재했던 AFP 통신 기자인 브루노 바르톨로니의 말을 빌면 폴란드 크라코프 대주교 출신인 보이틸라 추기경은 외국인 후보 중에서도 아르헨티나의 프란시스코 피로니오 추기경과 영국의 배질 흄 추기경에 이은 3번째 후보였다. 많은 사학자들은 이탈리아 출신 두 유력 후보의 팽팽한 접전 끝에 타협안으로가톨릭 456년 역사상 첫번째 비이탈리아인이자 첫번째 동구권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콘클라베의 유력한 후보는 매우 보수적인 주세페 시리 제노바 대주교와 요한 바오로 1세 교황과 매우 가까운 관계로 영향력 있는 지오반니 베넬리 피렌체 대주교였다. 첫번째 투표에서는 시리가 선두를 달렸고, 베넬리가 그 뒤를 바짝 따랐으며, 보이틸라는 그다지 많은 표를 얻지 못했다. 보이틸라는 처음에 베넬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30여 차례 투표 때까지 시리와 베넬리 어느 후보도 교황 선출에 필요한75표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시리는 너무 보수적이라는 단점이 있었고, 베넬리는 시리의 지지자들에게 절대 용납될 수 없는 후보였다. 추기경들은 외국인 후보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고, 교리문제에서 보수적이고 반공산주의 성향인 보이틸라 대주교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독일 뮌헨 교구 출신인 요제프 라칭어 추기경과 지난해 서거한 오스트리아 빈의 프란츠 쾨니히 대주교의 후원 아래 몇몇 다른 외국인 추기경들이 합세해 보이틸라 추기경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했다. 이미 콘클라베에 앞서 바티칸 근처 로마의 레오니아나 서점 뒷방에서 몇몇 추기경들이 만나 두 이탈리아 후보의 경쟁으로 콘클라베가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보이틸라 추기경을 밀기로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 보이틸라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은 주로 미국과 독일계 성직자로 이뤄진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이었다. 서점의 모임은 그 당시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오푸스데이'와 매우 가깝고 극도로 보수적인 견해로 알려진 외교관 출신 바티칸 관리인 실비오 오디 추기경이 주선했다. 보수적인 교리를 옹호하고, 평생 공산주의와 싸운 보이틸라 추기경은 로마 오푸스데이 회의에서 몇 차례 연설을 했으며, 바티칸 에큐메니컬 회의에 참석하며 바바티칸 성직자들과 접촉해왔다. 보이틸라라는 이름이 비록 많은 대중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추기경들은 그의 존재와 견해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투표에서 보이틸라는 흰 연기와 함께 태워지는 111개의 표 중 약 100표를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콘클라베의 결과 역시 아무도 점칠 수 없다. 콘클라베가 교착상태에 빠질경우 또 다시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다크호스 교황이 출현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로마ㆍ바티칸시티 AFP=연합뉴스) kj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