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조 < ENI 대표 cj@enicorp.biz > 사업을 하다 보면 여자라서 어려운 점도 있지만 좋을 때도 있다. 해외 출장시 남자들과 달리 우아한 식사 대접을 받거나 기억에 남는 가족 초대를 받는 일이 그것이다. 벨기에 방문 때도 그랬다. 궁정음악회 관람 후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사업파트너인 나이든 사장 부부,전무인 아들과 식사했다.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전무가 다소 큰소리로 "치어스"하며 와인잔을 부딪친 뒤 부모에게 프랑스어로 말했다. 그러자 노부인이 나이든 아들에게 "손님이 영어로 말씀하시니 프랑스어로 얘기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나지막이 충고했다. 그리고 "잔 부딪히는 소리와 말 소리가 옆 테이블에 들리지 않게 하라"고 덧붙였다. 순간 나는 식당에서 자녀들이 말썽을 피워도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네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몇년 뒤 다시 갔을 때는 집으로 초대받았다. 사장은 역사공부가 취미라며 유럽의 역사와 여행,특히 그리스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자기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또 자신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얘기하다 갑자기 눈시울을 붉혔다. 아내는 암에 걸려 시한부인생을 살고 있는데 아직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외국영화에서 노신사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당신은 정말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걸 보면 이해가 안됐었다. 하지만 그 부인의 눈동자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꼈던 나는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어느 사업가가 살고 있는 우아한 정원의 유럽풍 저택에 갔던 일도 잊지 못한다. 입이 떡 벌어지는 멋진 집의 입구와 통로를 지나 거실로 들어섰을 때 15세쯤 돼 보이는 여자애가 바닥에 앉아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갖고 놀 법한 인형 수십개를 놓고 옷을 입히고 있었다. 나는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집주인은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볼에 다정하게 키스한 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늦둥이 딸이라고 소개했다. 정신지체아였다. 우리 같으면 손님이 방문할 시간엔 눈에 안 띄도록 다른 데서 놀게 했을 성 싶은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은 진정한 사랑이 뭔지 깨닫게 했다. 집안 구경을 시켜주는 동안엔 서재 천장에 달린 백열등을 가리키며 "아직 마음에 드는 걸 찾지 못해서"라며 다른 소품을 산 경위도 설명했다. 살림살이 하나하나에 추억과 정성이 가득한 집에 사는 모습은 그윽했다. 물질만능주의에 파묻혀 앞으로만 내닫기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삶을 고마워하고 작은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