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78)의 장편 '텔크테에서의 만남'(민음사)이 번역돼 나왔다. 소설의 무대는 1647년 독일의 시골마을 텔크테. 신·구교의 갈등으로 유럽이 쑥대밭이 됐던 30년 전쟁(1618-1648)이 막바지로 향해 가던 때다. 독일의 시인들이 전쟁으로 분열된 조국을 '언어와 문학'으로 다시 한번 결합하고자 이곳에 모인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의 참상 속에서 인간의 기본 권리와 평화를 회복할 것을주장하려 했던 시인들은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면서 자신들의 탐욕스럽고 위선적인 본성과 마주하게 된다. 시인 지몬 다흐의 주관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시 낭독회와 군주에게 보내는 평화 호소문을 작성하려고 텔크테에 모였다. 그런데 시인들이 묵기로 한 여관이 독일의 아군인 스웨덴군에게 점거된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용병들은 상당기간급료를 받지 못하자 약탈로 보급품을 충당했다. 이 때문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군부대가 지나간 마을은 폐허가 됐다. 이때 황제군 연대의 부관 겔른하우젠이 구세주처럼 나타나 시인들의 숙소문제를해결해 주고 풍성한 식사까지 제공한다. 아무 생각없이 고기와 포도주를 즐긴 시인들은 그것이 농가와 수녀원에서 약탈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언어를 통해 독일 민족을 통합하고자 했던 시인들의 당초 목적은 무너진다. 결국 시인들은 시 낭독회에서 서로 헐뜯고, 파벌까지 생겨 반목과대립을 거듭한다. 귄터 그라스는 2차 대전 후 1947년 결성됐던 독일 '47그룹'의 이야기를 300년전으로 되돌려 소설로 풀어썼다. 소설가 한스 베르너 리히터가 주도한 '47그룹'은민군 측 전쟁포로로 잡혀 있던 독일 작가들이 무너진 독일 문학의 전통을 재확립하기 위해 발족한 모임이다. 이들은 나치의 선전문구 등이 독일어를 부패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장과시적 만연체를 배제하고 무미건조한 서술적 사실주의를 옹호했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의 초고를 여기서 발표했고, '47그룹 상'을 수상하면서문학적 명성과 지원을 얻었다. 귄터 그라스가 1979년 발표한 '텔크테에서의 만남'은 바로 1947년의 모임을 재구성한 것이다. "역사는 영원히 반복된다"는 작가 특유의 주제의식이 이 작품에도그대로 적용돼 있다. 작가는 소설에서 군인들과 한통속이 돼버린 시인들을 비판하고풍자했다. 하지만 '47그룹'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분노와 경멸보다 실소와 애처로움을 담아 시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안삼환 옮김. 276쪽. 8천원.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ckchung@yna.co.kr